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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 포항 석유의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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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엊그제 윤석열 대통령은 포항 앞바다에서 엄청난 석유 유전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KBS는 참으로 오랜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브리핑을 그대로 방영하는가 하면 아예 특집 프로그램까지 만들었다. 한편 시중에서 사람들은 ‘IT 강국에다 우리가 산유국까지 된다면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 일류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참으로 통쾌하고 아름다운 뉴스였다. 물론 유전이 채굴되기까지는 세월도 필요하고 최첨단 시추기술도 요구되는 것이 사실일 뿐만 아니라, 석유가 고갈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포항 앞바다인 동해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었다는 것에 포항 시민들이 들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포항 시장은 “앞으로 석유 시추에 관해서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라고 선언까지 하였단다.

 

사실 포항 석유 문제는 약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항에 석유가 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먼저 주장한 사람은 전직 광산업자인 <박영조>라는 분이다. 그는 석유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아니고 그 방면에 학술적으로 연구한 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광산업을 하면서 포항 근처에 석유가 날 수 있는 암석을 발견하면서 점점 포항 지역에 석유가 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오로지 석유 연구 및 석유탐사 연구에 올인했다. 그 당시는 그 누구도 한국에 석유가 날 것이라는 말을 한 사람도 없었고 실제로 연구한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영조>씨는 석유 연구에 생사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어에 유창해서 일본어 서적을 뒤지면서 포항과 동해안 일대를 돌아다니며 바위, 돌, 풀, 모래를 미친 듯이 채집하여 연구하던 중 드디어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귀중한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 샘플 화석을 가지고 모 국립대학교 지질학 교수들에게 고증을 의뢰했지만, 번번이 교수들은 ‘어떻게 우리나라 특히 포항에서 석유가 날 수 있느냐!’면서 코웃음을 치고 그를 개무시하였다. 자신들은 전문가이고 <박영조>는 아마추어로 보았기에 철저히 그의 의견을 깔아뭉갠 것이다. 

 

그래도 <박영조>씨는 굴하지 않고 유충이 박혀 있는 화석자료를 일본 최고의 석유권위자에게 보냈다. 그리고 자신이 확신한 대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재정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석유를 발견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채권을 발행하기로 했다. 그때 <박영조>씨는 자신의 친구이고 나의 친형님인 <정조웅>과 함께 이 일을 진행했다. 세월이 60여 년이 흘렀지만, 형님은 그때 석유탐사 작업에 동참하고 같이 사역하게 된 것을 늘 자랑했었다. 바로 그 시기에 이 사실을 눈치챈 <중앙정보부>에서는 이 일을 은밀히 ‘자기들이 관여할 것이라고 했고, 시추를 하겠다’고 했다. 그때 <박영조>씨는 동해바다에 석유가 있는 암석을 뚫을 수 있는 시추봉 길이를 알려주었다. 후일 <박영조> 씨의 말에 의하면 ‘자기가 제안했던 길이의 절반 정도만 가지고 시추를 했으니 그 일은 실패였다’고 했다. <박영조>씨의 말을 빌리면 ‘그때 <중앙정보부>에서 시추비의 절반을 갈취했기에 그 일이 성취될 수 없었다’고 했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에 석유가 난다고 발표까지 했는데, 결과는 원유가 아닌 경유로 판명되었다. 그때 상황은 월간조선 편집인이었던 <조갑제> 대기자가 당시 상황을 잘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석유 시추계획은 학계에서도 외면받고, 중앙정보부에서도 실패하고, 포항시에서도 무심했다. 그래도 <박영조>씨는 포항에 석유가 난다는 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죽기 살기로 해변을 헤매고 다녔다. 누구 하나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이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80년에 필자가 대학 총장이 되자, 형님이 그에게 은근히 동생 자랑을 한듯하다. 그래서 내심 그는 ‘혹시 서울에 있는 대학 총장이면 대통령이나 고위 관리와 연결될 수 있을까?’ 했던 것이다. 당시 포항에는 세계적 대학인 POSTECH도 설립되지 않았고 2년제 포항 수산대학만 있을 때였다. 

한번은 <박영조>씨 일행이 총신대 총장실로 나를 찾아왔고,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브리핑했다. 그리고 그의 석유탐사에 대한 노력과 포항에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확실한 증거물, 예컨대 화석의 유충을 현미경으로 찍은 것을 다시 확대경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연구실적물과 일본의 자료들을 보여 주면서 ‘혹시 유럽의 학자들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브리핑을 듣고 그의 말에 공감은 했지만, 내 힘으로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당시는 자원개발공사 사장이던 김복동씨를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섣불리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박영조>씨는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포항에서 서울까지 한두 차례 더 와서 나를 졸랐지만, 나는 대학 총장으로서 더욱이 목사로서 기도해 줄 뿐이었다. 그 후 세월이 지나서 나의 친형도 세상을 떴고, <박영조>씨도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가 살아 있었다면 90은 넘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오직 ‘자원 빈국 대한민국 포항 앞바다에 반드시 석유가 나올 것이다’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시기와 협박을 받으며, 초지일관(初志一貫)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포항 석유의 미치광이 <박영조>씨를 추억한다. 

 

연구실의 데이터 분석과 이론을 말하는 교수들도 귀하지만, 현장에서 석유를 찾아 생명을 거는 사람도 귀하다. 이것은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논리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구도 귀하지만, 현장에서 생명을 걸고 일하는 신실한 지도자들이 열매를 맺는다.

 

 윤석열 대통령의 그 큰 꿈은 60여 년 전 <박영조>가 꿈꾸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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