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미래신문)
최고의 가치
말씀:빌립보서3:1~11 요절:빌립보서3:8
우리는 무엇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까? 오늘 본문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고상한 것,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얻어야 할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생의 최고가치가 되시는 예수님을 얻고자 하는 사도 바울의 열정을 배울 수 있길 축원합니다.
1. 가장 귀한 나의 예수님
영국 왕 조지 5세의 맏아들인 에드워드 8세는 부친인 조지 5세가 세상을 떠나자 1936년 독신인 채로 대영제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8세는 왕이 된지 11개월 만에 왕관을 벗고 왕좌에서 내려옴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프슨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이혼한 경력이 있는 심프슨 여인과의 결혼을 영국 왕실이 용납하지 않았고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에서조차 반대했습니다. 그는 심프슨과의 결혼을 위해 대영제국의 왕관을 미련 없이 던져버렸습니다. 그는 에드워드 8세라는 이름을 버리고 윈저 공이라는 이름으로 결혼을 한 후에 프랑스로 건너가 여생을 심프슨과 함께 했습니다.
심프슨 여인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나는 참으로 행복한 여자다. 나는 잠시라도 슬픔을 가질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왕관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왕국보다 나를 더 귀중히 여기고 나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 막대한 권력과 부를 누리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해 주는 남자를 가진 여인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사실 알고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하늘 영광을 다 버리신 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우리 인생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모든 고난과 박해를 다 받으시고 험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보여 주신 이 놀라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심프슨 여인과 같은 감격적인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는 슬픔을 가질 자격조차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대영제국의 왕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심프슨 여인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씩이나 이혼한 경력을 가졌던 미국 여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과 은택을 입었던 것처럼 우리야말로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은 주의 거룩한 백성들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그의 신앙 고백을 합니다.“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이 많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파 이스라엘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혼혈아가 아니라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지파 중에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 베냐민 지파입니다. 바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라는 것은 혈통과 가문에 있어서 성골이요, 최고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히브리인들 중에는 일찍이 이방나라로 이민 가서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말할 줄 모르는 히브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히브리어를 사용할 줄 아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또 바울은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철저히 받고 자란 바리새인이요. 그중에서도 가장 학식이 이 높고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즉 우리로 말하면 서울법대 나오고, 군대를 장교로 갔다 오고, 청렴한 판사로 인정받는 KS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울이 과거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고 자랑했던 것들을 분토처럼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귀중한 것도 예수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비교해 보니 그 모든 것은 배설물이었고, 분토였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난 다음부터 바울의 생애는 오직 예수님만이 삶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그럼 바울은 이 예수님을 얻고자 어떤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까?
2.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첫째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에 자랑거리들을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얻으려고 하니까 방해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신뢰하던 육체가 바로 장애물이요, 방해물이었습니다. 자랑할 것 많은 자기, 똑똑한 자기, 내세울 것 많은 자기. 바로 그 자기가 너무 커서 예수님이 잘 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귀한 물건을 집에 들여놓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과감하게 버립니다. 내가 뱃속에 새롭게 맛있는 음식을 채우려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 뱃속에 있는 것들을 배설물로 버려야 합니다. 화장실에 갔다 와서 ‘아, 아깝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 시원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최고의 보배되신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과거에 자기가 자랑하던 자아를 과감하게 배설물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처장관을 지냈던 정근모박사는 어려서부터 주로 수석만 하고 자랐습니다. 경기중, 경기고등학교를 수석 입학하였습니다. 고등학교도 딱 4개월 다니고 대입검정고시에 수석입학한 후 서울대학에 차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학부 졸업 후 서울대 행정대학원도 수석으로 입학하였습니다. 미국 유학생으로 가서도 미시간 주립대학 유학생들 중에서 수석으로 입학합니다. 그는 머리가 얼마나 뛰어나든지 석사도 건너뛰고 2년 6개월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24살의 나이에 플로리다 대학에 물리학 교수가 됩니다. 그리고 MIT공대, 뉴욕대학 교수를 거쳐 32살에 KAIST 초대 부원장이 됩니다. 그 후 과기처 장관, 한전사장, 국제 원자력 기구 의장등 최고의 자리를 최연소로 오릅니다. 결혼도 빨리 해서 23살에 결혼한 후 1남 2녀를 낳고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항상 천재, 최연소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만날 필요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자기가 공부한 핵물리학이 가장 최고의 학문이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밖에 없는 아들 진후가 만성 신부전증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신도 간염에 걸리고, 위암진단을 받고 위 수술을 하게 됩니다. 그 아들도 IQ 156의 천재소년이었지만 15년 동안 10여 차례의 수술을 받고도 결국은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이때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게 됩니다. 자신이 그토록 신뢰하고 자랑했던 자신의 육체와 실력, 세계가 인정하는 핵물리학자였지만 병으로 죽어가는 외아들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아들을 위해서 자신의 신장 하나까지 떼어주지만 그 아들을 하늘나라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그는 완전히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 자신의 그 화려한 경력과 학력과 자리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를 발견하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통곡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진정한 보배요,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마음으로부터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신이 과거에 자랑거리로 여기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복음전파자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는 자서전 맨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상에서 보혈을 흘리며 절규했던 인류의 대속자, 그 분을 통해서 나의 삶은 새롭게 변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과학자이기에 앞서 한 크리스찬임을 더욱 자랑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내 삶의 전부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시다. 호흡이 계속되는 그 날까지 아멘.” 저희들도 예수님이 최고 가치가 되시며, 참 보배되심을 영접하고, 나의 과거에 자랑거리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예수님을 얻되 예수님의 최고봉인 부활의 권능을 얻고 체험하길 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단지 예수님을 지식적으로 알고 예수님의 일부분만을 얻길 원치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얻되 예수님의 삶의 핵심을 배우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수가 무엇인가? 봤더니, 그것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부활은 최고의 신비요 예수님 생애의 최고의 정점이었습니다. 산을 타는 등산가들이면 다 이 세상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에 올라가 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님의 사역의 최고봉인 부활의 산에 오르고자 하였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체험해 보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코스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부활의 영광에는 이르고 싶은데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코스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딜레마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이 딜레마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발걸음을 돌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살고 봐야지, 죽는 것까지야 할 수 있나?”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배우고, 닮기 원하면서도 일정한 한계선을 그어놓고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만 약간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어찌하든지 축복은 받기 원하되 예수님이 당한 고난에는 참예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손해 안보고, 어찌하든지 고생 안하고, 어찌하든지 힘든 십자가를 안 지고, 편하고 쉽게 신앙생활 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고뇌요,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고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갚을 길 없는 은혜임을 고백하는 크리스천입니까? 바울은 어찌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의 권능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고자 하는 삶을 산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살면서 사도 바울처럼 참 보배 되신 예수님을 얻기 위해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투자할 수 있는 용기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함으로 부활의 영광을 체험하는 영광된 삶을 살아 갈수 있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