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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애국자」 황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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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수 박사는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시사미래신문)            


   황성수 박사라고 말하면 독자들은 대게 의사이며, 채식주의자인 황성수 박사를 떠 올릴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황성수 박사는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 헌법을 기초하고,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놓은 정치가요, 법조인인 황성수 박사를 말한다.

그는 다양한 경력과 한국사회와 교회에 걸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아름다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므로 오늘날과 같이 정국이 혼란스럽고, 교회가 갈 길을 잃어버린 이 때에, 그의 인격과 천재적인 아름다운 삶을 살면서도, 늘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했던 그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황성수 박사와 만남은 1963년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총신에서 황성수 박사의 <법학통론> 강의를 들었다. 그 후 세월이 흘러 황성수 박사는 정계를 은퇴했고, <총신>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977년 그해 여름이었다. 나는 화란 유학에서 돌아와 총신에 복직 되었을 때, 왕십리교회 수양관에서 있었던 청년 수련회 강사로 초청되었다.

3박 4일 동안 새벽, 낯, 밤 그렇게 하루에 세 번씩 집회를 인도했다.

그때 청년부를 맡고 있었던 목사가 바로 황성수 목사였다. 그는 서재신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왕십리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주일 대예배 설교도 하면서 청년부를 맡아 사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3박 4일 동안 나와 황성수 박사는 함께 식사를 나누고, 함께 대화를 나누고, 함께 기도하면서, 나는 황성수 박사의 인격과 삶을 곁에서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나는 황성수 박사와 둘이 마주 보면서 식사를 하는데, 황 박사님은 나에게 「정 박사님, 나는 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법학자로서 대한민국의 헌법 기초 위원으로, 4선 국회의원으로 국회 부의장으로 일한 애국자인 것이 맞다. 그러나 알고 보니 황성수 박사가 말한 <애국자>는 <국물을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그의 유머를 생각하면 나는 웃음이 절로 난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황성수 박사만한 인격과 실력을 겸하고, 거기다가 확실한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인물은 그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화려한 학력과 경력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높이려는 삶의 족적은 한국정치사에 거의 유일한 분이다.

 

 황성수 박사는 전라남도 보성 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보성의 한 목회자였다. 황성수 박사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는데 모두가 목사가 되었다. 그는 명문가의 가정이요, 신앙의 가정이었다. 그는 전라남도 출신이지만, 평양 숭실중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다녔다.

신사참배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자, 일본으로 건너가 동북제국대학교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동경제국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또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콜롬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코넬리우스 봔틸(Cornelius Van Til) 아래서 신학 특히 <기독교 변증학>을 공부했다. 


황성수 박사는 영어와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당대의 최고의 지성인이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헬만 바빙크를 공부했다. 그래서 황 박사는 나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그가 웨스트민스터 시절에 썼던 페이퍼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해방 직후 현직 미국관리의 신분으로 맥아더 사령부와 미국군정청 사령관의 고문관으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독립의 기초를 놓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외무부 초대 정보국장, 제7대 전남도지사 4선 국회의원, 30대에 국회 의장, 극동방송 설립자, 전국 남선교회를 창립하고 1~6대까지 회장으로 있었고, CBMC(기독실업인회)를 창립하고 1~8대까지 일했다.

 

황성수 박사는,
<정치가>, <법학자>, <변호사>, <민의원 의원 3번>, <참의원 의원>, <국회 부의장>, 
<외교관>, <UN대표>, <교의신학자>, <목사>, <조직가>, <번역가>, <웅변가>, <설교가>, <연설가>, <교수>, <학장>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쓴 책으로는 <옛 세계관과 새 세계관>이 있다. 사실 세계관이란 말을 처음 쓰신 분이 황성수 박사였다. 그리고 황성수 박사는 교의신학자로서 로마서의 전문가였고, 그의 연설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했고, 그의 설교는 청년들을 새 세계관을 갖도록 인도했다. 나는 그가 번역한 <성서와 그리스도>란 책을 세 번이나 통독했다. 그 책에는 <동정녀 탄생론>, <기독 부활론>, <성경의 영감론> 등 개혁신학자들의 논문들이 있었다. 

 

그가 미국으로 이민 갔을 때, L.A 충현교회를 설립하였고, 나는 L.A에 갈 때마다 황 박사를 만났다. 그러나 이제 그도 나이 들어 암에 걸려 쇠약해져서 살 가망이 없을 때, 나는 그를 그의 자택으로 심방을 갔었다. 내가 환자를 위해 기도하려 했으나, 오히려 그는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면서 「하나님! 이 늙은 종을 붙드시고, 정성구 박사를 축복하시고 더 큰 일을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주었다. 그는 칼빈과 카이퍼의 사상에 충실한 정치가이자 신학자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정치판을 들여다보자.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가 대통령이 되었고, 또 앞으로 대통령 후보로 나올 자도 공산주의 사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시중 잡배들과 조폭들이 후원을 한단다.

이들 중에 정치를 탐하고, 백수, 건달, 놈팽이들과 데모전문가들이 밀어주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와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런 절박한 시국에 황성수 박사처럼 유창한 영어와 제대로 된 법률가요, 정치가인 애국자, 겸손한 국제적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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