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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언더우드 타이프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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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몇 주 전, 오랫동안 찾던 언더우드 타이프 라이트(Underwood type writer)를 구입했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는 한국 최초의 목사 선교사로, 금년이 그의 입국 140주년 되는 해이다. 언더우드는 조선에 입국한 첫 번째 목사 선교사로서, 그가 조선에 남긴 족적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구세 학당을 세우고, 어둠에 있던 조선을 깨웠을 뿐 아니라,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의 가문은 4대를 거쳐 오늘날 한국 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언더우드가 역동적으로 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이 기업가의 가문이었기에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특히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업인 언더우드 타이프 라이터는 급성장했고, 1930년대까지 5백만 대가 팔렸다. 회사가 잘 되어 형인 토마스는 언더우드 선교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5만 불을 선뜻 헌금했다. 당시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형 토마스의 헌금의 아니었으면 오늘의 연세대학교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교육 선교뿐 아니고 오늘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초대 총회장으로서, 한국 장로교회의 틀을 놓았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장로교의 선교사로 한국에 왔지만, 영국에서 온 이민자로서 뉴욕대학과 뉴저지주의 뉴 브른스위크(New Brunswick) 신학교를 졸업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뉴 브른슨위크 신학교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의 중심 신학교이다. 1628년 네덜란드 개혁교회 성도들이 이민 와서 뉴욕의 멘하탄을 중심으로 도시를 일구고 교회를 개척하고 신학교를 세웠다. 언더우드는 네덜란드 개혁신학교를 졸업했지만, 당시 미국 개혁교회가 선교사 파송에 소극적이자 장로교회로 옮겨서 1885년에 한국으로 파송되었다.

 

필자는 몇 번 언더우드 선교사가 졸업했던 뉴 브린스위크 신학교를 방문했었고, 총장님과 교수님들을 만나 보았다. 한 번은 학교 게스트 하우스에서 1박 중에 나의 자료 수집에 대한 광기가 발동되어 도서관을 헤맸고, 나는 도서관에서 지하실 끝부분에서 폐기 직전의 문서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1884년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제출했던 육필 이력서를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고, 카피 본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튿날 사서에게 그 내용을 말했더니, 자신들도 알지 못했던 자료를 어찌 찾았는가! 라고 탄복했다. 후일 다시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제물포로 가져왔던 <이두현토 성경> 사본 하나를 도서관 전시실에 기증했다.

 

사실 언더우드를 모르면 한국 기독교회를 모르는 것이다. 지금부터 40년 전, 언더우드 목사가 제물포로 입국한 지 100주년 되는 해였다. 한국 교회 연합회에서는 1884년 알렌(Allen) 의사가 입국한 것을 한국 교회의 시작으로 보고 장, 감, 성 모든 교파들이 하나가 되어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창하게 했다. 대회장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최훈 목사, 김경래 장로님의 실무 지휘로 각종 심포지움, 자료 전시 100주년 기념 대회까지 열렸다. 그러나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 총회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1884년 북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 알렌(Allen)이 의사로 온 것은 맞지만, 그분은 고종의 어의(御醫)가 되었고, 후일 미국 공사로서 약간의 잡음도 있었다. 알렌은 선교사의 활동의 근거를 마련한 것은 맞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언더우드 목사의 입국으로 보았다. 그는 목사였고 뉴욕대학과 뉴 브른슨키 신학교를 졸업한 명실공히 첫 번 선교사이기에, 합동 측 총회는 1985년에 한국 장로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자고 했었다.

 

그 행사의 기획은 당시 합동 측 총회장을 역임하고 해외 선교부장이 된 이영수 목사의 발상과 기획으로 진두지휘 되었다. 1985년 4월 5일, 100년 전 언더우드가 입항했던 제물포 앞 바다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언더우드 선교사 입국 재현 행사를 했다. 그날은 언더우드 가족 26명이 제물포로 초대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프로젝트였다. 그 퍼포먼스의 핵심은, 큰 배에서 언더우드 4세인 원한광씨가 성경을 가지고 내려와서 작은 배로 갈아타고, 제물포의 옛날 선착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영수 목사를 비롯한 핵심 인사들은 언더우드 가족들과 함께 배에 탔었다. 물론 필자도 그 배에 함께 했었다. 그리고 부둣가에는 김창인, 최훈 목사 등이 영접했고, 언더우드 4세는 도착한 지점인 땅에 키스했다.

 

그리고 도착 예배가 진행되었다. 축사로는 원일한 박사가 했다. 이 행사에는 인천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수천 명의 성도들이 참석 했다. 대형 버스 100대, 소형버스 200대, 기타 승용차까지 합해서 500대가 인천 제물포에서 잠실 체육관까지 거대한 행렬을 이루었고, 체육관 안에는 성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선교사들도 참여 했고, 일본을 대표해서 고베 개혁파 신학교의 교장 하시모토 목사도 함께 했다.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선교사로 온 기념일을, 이토록 성대하게 치룬 것은, 그때가 처음이요 마지막인 듯하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140주년 되는 해에 필자가 찾았고, 한국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1918년의 No.5 언더우드 타이프 라이트가 기억을 되살려 준다.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가 처음 조선 땅에 도착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지금은 예배 드릴 예배당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하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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