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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 진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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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1960년대 말, 필자는 논산 훈련소와 광주 육군 보병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비록 늦은 나이에 군 입대를 했는데 당시에 북한 124부대 특수요원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 사건 이후라, 우리 군부대의 훈련을 어느 때보다 힘들게 시켰다. 그때 처음 배운 것이 군가 <진짜 사나이>였다. <진짜 사나이>라는 군가는 1962년 유호 작사, 이흥열 작곡이었다. 즉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유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때에 부모 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그리고 3절에는 「겉으로만 잘 난체해 사나이라더냐 너와 나 진짜 사나이 명예에 살았다...」이었다. 우리는 <진짜 사나이>를 행군하면서 수도 없이 목청껏 불러 댔다. 필자는 농촌 개척교회를 하다가 군에 부름을 받았지만, 병약해서 훈련이 겁이 났으나, 군가는 내게 용기를 주고 어찌 어찌하여 임관하게 되었다.

 

사나이는 다른 말로는 <상남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나이는 근육질이나 알통이기보다 의리와 지조와 용기와 담력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남자들은 덩치가 커진 것은 맞지만, 시류에 아부하는 기회주의, 이기주의, 보신주의 자들이 많아 자기희생을 하여 대의(大義)를 쫓는 사나이는 그리 흔치 않다. 학벌 사회가 되어 명예와 돈만을 쫓아 우선 자기 것만 챙기고 어느 때라도 배신자가 될 수 있는 참으로 가벼운 세상이 되었다. 한마디로 위도 아래도 없는 세상이다. 군에서는 말년 병장이 이제 갇 들어 온 장교를 두들겨 팼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러니 군의 지휘 체계가 무너져서 지휘관이 명령 하달을 해도 그 아래 사람들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반론을 제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최근 어느 장군님께서 눈물을 찔끔찔끔 짜면서 손수건으로 눈물 훔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사나이는 아무 때나 눈물을 보여서는 안되는 데...보기가 참으로 민망했다. 군이 그러할 찐 대 다른 분야도 엇비슷하다. 하여 무한 경쟁 시대에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에 살아나는 방법으로, <중간지대> <회색지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라는 참으로 묘한 처세술을 가진 사람들만 살아남고 있다. 그러니 요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식으로 순발력 있게 대처하는 사람만이 출세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어떤 이가 “人 자 4개를 쓰고서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라고 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패러디한다면 “남자라고 다 남자야! 남자 같아야 남자이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이순신> <안중근> <이봉창> 등 자기가 죽을 줄 알면서도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면 기꺼이 자기의 목숨을 던졌다. 진짜 사나이들이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해서 우리나라를 일본의 신민(神民)을 만들었기에 집착했다. 남산에다 신사(神社)를 만들고 모든 사람이 참배하도록 했다. 그 당시 모든 사람은 빠짐없이 신사참배를 했고, 심지어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의 신앙은 무너지고, 모두가 신사참배에 동참했었다. 그러나 이때 평안북도 출신의 의사 박관준 장로가 있었다. 그는 교회의 장로로서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박관준은 모두가 친일로 돌아서서 목숨을 연명하고 있고, 나라가 깡그리 망해가는 것을 보고, 구약의 다니엘처럼 생명을 내걸었다. 그는 일본 제74회 제국회의(국회)에 들어가서 폭탄선언을 하고 일본 정부와 국회를 뒤집어 버렸다.

 

당시 모든 사람이 일제에 아부하고 종노릇하기에 바빴던 시기에 진짜 사나이로서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대한민국의 남자로서 결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내건 일이었다. 1938년 3월 24일, 오후 1시 48분, 일본 제국회의장에는 여야의원들과 내각들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개회되고 있었다. 이때 일본 제국회의에 방청석으로 잠입한 박관준 외에 그의 아들 박영창(당시 26세)과 통역을 위해 안이숙도 동행하였다. 하지만 안이숙은 박관준 장로가 목숨을 걸고 일본 제국회의를 뒤엎어 버릴 묘수를 미리 알고 여러 차례 말리기도 하고 마음 졸이고 있었다. 드디어 의장이 개회를 선언하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2층 방청석에서 앉아 있던 박관준 장로는 벌떡 일어나 <애호바 가미사마노 다이시메이다!>라고 고함을 치면서 사전에 준비한 성명서 뭉치를 아래층으로 힘껏 던졌고, 일본 국회는 삽시간에 쑥대밭이 되었다.
그리고 박관준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그의 나이 62세 때의 일이다.

 

그는 당시 의사였기에 개인적으로 편히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의가 부를 때는 생명을 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진짜 사나이었다. 그는 일본 국회를 향한 요구서의 마지막에 장작더미에 불을 지르고, 신(神)도 1명, 불교도 1명, 기독교도 1명씩을 올려놓고 최후까지 살아남는 자의 종교를 참된 종교로 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그는 조국을 살리고 기독교의 참됨을 증거하자는 다니엘의 기백대로였다. 그래서 후일 역사가는 박관준이야 말로 한국의 엘리야였다고 했다. 박관준 장로는 6년의 옥고 중에 한(漢) 시(詩) 한 수를 남기고 순교자의 잔을 마셨다. 그 한(漢) 시(詩)를 우리말로 하면 다음과 같다.
「인생 일대에 한 번 죽음이 있으니 어찌 죽을 때 죽지 않으리오. 그대 홀로 죽을 때 죽었으니 천추에 죽었어도 죽지 않았도다. 죽을 때가 와서 죽지 않으면 살아 즐거움이 죽음만 못하리라. 예수 나위해 죽었으니, 이제 내가 예수 위해 죽으리라!」고 했다.

 

 비겁한 그리스도인이 많고, 배신자들, 졸장부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불법과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생명만을 지키려는 시대에 진짜 사나이가 보고 싶다. 갑자기 옥중에 있는 윤 대통령이 오버 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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