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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3·1운동과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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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금년은 3·1운동 104주년이다. 그리고 상해임시정부 104주년이기도 하다. 이처럼 뜻깊은 해를 맞아 정부와 언론, 학술 단체들이 3·1운동 정신을 되살리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지하는데 여러 가지 이벤트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더구나 한국기독교회도 3·1운동 당시 교회가 주도적으로 3·1운동의 견인차라는 것을 부각시키고, 오늘 우리에게 당면한 평화통일의 방향을 제시하겠다고 잔뜩 고무되어있다.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고마운 일이나, 상대적으로 1948년 8월 15일 자유 대한민국 건국일은 가리워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치 대한민국이 100년 전에 탄생한 듯 회자되고 역사기록을 바꾸려는 듯하고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가 아무리 크다 해도, 임시와 정시를 구별해야 할 듯하다. 또 하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국가인 듯이 폄하하는 세력이 있었는가 하면, 입장을 달리하는 식자층이나 역사가들도 그리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이 짙다. 필자는 이 글에서 3·1운동 전후의 사건과 임시정부를 살피면서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기독교적 시각에서 조명해 보고 싶다.

 

필자는 근 50년간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이 한국교회의 토양 속에서 어떻게 뿌리 내렸는가를 연구하기 위해서 힘써 왔다. 그래서 이것과 관련해서 적잖은 사료를 수집 정리해왔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이승만 박사의 거처였던 <이화장>에 가서 몇 번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고,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지역인 하와이를 세 번이나 가서, 하와이 대학교 동서센터에서 독립운동의 희귀한 자료를 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사가 공부했던 프린스턴 대학교를 10여 차례 방문하고 그의 족적을 연구하기도 했다.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근세에 와서 우리 민족의 위대한 민족운동의 하나이다. 일제의 탄압과 만행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민족적 항거는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3·1운동의 발원은 교회이지만, 3·1운동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배경을 업고 나선 운동은 아니었다. 다만 3·1운동에 가담한 분들이 기독교 교인 개인 자격으로 이 운동의 선봉에 선 것뿐이다. 최근에 많은 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한국교회가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는 하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하지만 3·1운동 전후해서 목사들의 설교에서 <민족적 자각을 깨우는 설교>가 많았고, <일제의 폭정에서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나님의 심판이 불의한 세력을 망하게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승리>를 소리 높이 외친 설교들은 결과적으로 민중을 깨워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준 것은 맞다. 당시에도 교회의 숫자가 주재소(파출소) 숫자보다 많았고, 목사들이야말로 외부 세계의 정보를 선교사들을 통하여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또한 3·1운동은 위대한 애국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와서 지역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정신이 싹트기 시작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근대화는 기독교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1993년 모스크바에서 한국학 세계대회가 열렸는데, 그때의 주제는 「한국의 현대화」(Modernization of Korea)였다. 그 당시 한국에 여러 대학 대표들이 참가해서 의미 있는 발표를 했지만, 필자는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교 신앙> 곧 <복음>이 한국 현대화의 근거라고 발표한 일이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한글 보급을 통해 민중을 깨우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해 신지식을 배우게 하고 과학의 발전과 생활개량, 자유 사상을 함양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비적 활동이 사실상 3·1운동의 도화선으로 볼 수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 박사는 배제 학당 출신이고, 고당 조만식 장로는 숭실 학당 출신으로 오산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3·1독립선언서의 서명자이며 기독교 대표인 남강 이승훈은 오산학교 창립자로서 인재를 많이 배출했다. 그리고 3·1운동 전에 이미 자유 언론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 근대신문은 <독립신문>이 그 첫 기수이고 서재필이 주관했다. 그 밖에 이승만, 남궁억, 윤치호 등은 모두 한국초대 언론인들이었다. 1896년 4월 7일에 <독립신문>이 나왔고 이듬해인 1897년 2월 2일에는 <조선 그리스도신문>이 나왔는데 이 신문에는 모두가 <자유>, <민족주의>, <민권> 사상을 계몽했다. 특히 한국교회가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과 인간개조 운동을 벌인 것이 3·1 독립운동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고 그 후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하게 된다. 그리고 3.1운동 당시에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시대의 파수꾼> 노릇을 바로 했다. 그때는 조국이란 말만 해도 모두 가슴이 뛰었고, 자유와 독립이란 말만 해도 모두 가슴이 뜨거웠고, 자유와 독립이란 말이 민족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그때는 시대의 파수꾼이 있어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민족을 깨워주었다. 그러므로 모두가 타락과 죄악의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하여도 파수꾼만큼은 잠들어서는 안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을 보내고 있다. 때문에 오늘의 파수꾼인 지도자들은 생명 걸고 <적군이다!>, <도적놈이다>, <깨어라!>, <일어나라!>고 고함을 쳐서라도 잠자는 자들을 깨워야 한다. 일찍이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은 말하기를 「목사에게는 두 가지 음성이 있다. 하나는 양들을 잔잔한 시냇가로 인도하는 부드러운 음성이고, 또 다른 음성은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려고 할 때는 생명 걸고 고함치고 막대기를 휘두르고 악한 이리를 쫓아내는 분노한 음성이다」라고 했다(요한 칼빈, 목회서신 주석. p.290). 목장에 이리가 양을 잡아먹는데, <중도>니, <중립>이니 하는 목자는 삯꾼이다. 이 민족의, 이 시대의 파수꾼은 교회이고, 교역자이고, 성도들이다. 파수꾼이 깨어 있는 시대는 그래도 소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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