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8 (토)

  • 맑음동두천 25.9℃
  • 맑음강릉 31.6℃
  • 맑음서울 26.5℃
  • 맑음대전 27.0℃
  • 맑음대구 29.2℃
  • 맑음울산 27.4℃
  • 맑음광주 27.8℃
  • 맑음부산 24.0℃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5.0℃
  • 맑음강화 22.6℃
  • 맑음보은 26.3℃
  • 맑음금산 27.7℃
  • 맑음강진군 25.3℃
  • 맑음경주시 30.3℃
  • 맑음거제 24.4℃
기상청 제공

예수를 마음을 품고 삽시다(빌 2:1-11)

URL복사

예수를 마음을 품고 삽시다(빌 2:1-11)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에 무엇인가를 품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슬프고 아프고 서러운 기억을 품고 한평생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름답고 좋은 일 그리고 기쁜 기억을 마음에 품고 감사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누가 행복할까요?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이렇듯이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부흥, 가정의 행복 그리고 일 년의 성공 또한 얼마나 서로 일치된 마음(한마음)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념과 사상, 재산과 젊음도 세월 앞에 변하고 쇠하기에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첫째,  한마음 즉 겸손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1-4절).

 

1-4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아멘.

 

모든 사람은 각 생각과 마음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공동체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한 마음(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19:113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할 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장면을 보고자, 그 갈멜산에 올라왔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모든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마디 말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그 마음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빌립보서 4:2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다니는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화평하지를 못했습니다. 다투었습니다. 마음이 달랐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 되지 못하고,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섰습니다. 몹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의 마음이 다를 수 있지만 다툼이 변하여 화목하고, 분열이 하나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겸손의 마음으로 일할 때만이 가능한 대안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품게 될 때에 사역에서도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고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고, 자기 일을 돌아보고 각각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볼 수 있는 해량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둘째, 예수의 마음을 품을 때 가능 합니다(5-8)

 

5-8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겸손의 본보기로써 그리스도 예수를 제시함으로써 성도의 일치를 위한 겸손을 가르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그리스도께서 철저한 자기비하(自己卑下)를 통하여 죄에서 백성을 구원하신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마음은 비우고 낮추고 복종시키는 겸손이고 이는 곧 십자가의 마음입니다.

 

1. 예수그리스도의 겸손은 낮아지심(자기비하)(7-8)

 

그리스도 예수의 극도의 낮아지심(자기비하)의 단계는(6-8) 하나님의 본체(6)→자기를 비우심(7)→종의 형체를 취하심(7)→사람이 되심(7,8)→자기를 낮추심(8)→십자가에 죽으심(8)이다.

 

겸손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과 동등하나 그렇게 여기지 아니하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同等)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동등'은 헬라어로 ' '(이소스)인데 '수, 크기, 질(質) 등에 있어서 아주 똑같다' 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똑같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십니다.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에 비하여 질적으로 조금도 떨어지는 부분이 없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에 구별은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기에 성부는 성자에 대하여 아버지이시고 성자는 성부에게 영원한 아들이시라는 점입니다(요한복음8:4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성부 하나님과의 동등임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입니다.

 

(2) 자기를 비우심

"오히려 자기를 비어"(7절 상반절). '자기를 비우다', 자기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모든 요소를 부정하였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진하여 사람의 모양을 입으셨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의 형상을 입을 수 있는 자리에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셨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모양을 입을 여지를 마련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3) 사람이 되심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7절 하반절). 스스로 자신을 비워 사람의 모양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종의 형체', 주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주인이시고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속한 종들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卑下)는 곧 종의 자리에 나아가셨다는 점입니다.

첫 인간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시도하다가 타락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와는 반대로 하늘 영광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사 기꺼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심으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자기 비하의 극치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수치(羞恥)와 저주로 사망(死亡)의 자리인 음부까지 내려 가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랄3:13)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이 시체가 되어 매장되심은 낮아지신 신분의 최종 수치였다.

 

2. 겸손의 모본이신 그리스도의 존귀하게 되심(9-11)

이제부터 예수님의 높아지심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신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주어는 모두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주어가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이 말씀의 주어가 되셔서, 지극히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이셨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어떻게 높이셨습니까?

첫째,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넷째, 하나님은 예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예수님을 네 단계로 높이셨습니다. 첫째 단계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둘째 단계는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셋째 단계는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심입니다. 넷째 단계는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다스리시며 그들의 경배를 받게 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들 네 가지 가운데, 마지막 네 번째 단계만 대표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사실로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경우가 종종 나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또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새 이름은 “주”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바로 자신의 이름을 예수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어떤 이름이 이보다 더 뛰어나겠습니까?

 

행2:36에도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셔서, 만백성의 경배를 받으시게 하셨습니다.

 

벤자민 플랭클린은 미국 건국초기의 지도자로서 대통령을 못했지만 모든 요직을 다했습니다. 학교생활은 2년 밖에 못했는데 그가 22살에 스스로 반문하기를 ‘내 인생에 가장 우선순위에 있는 것이 무엇일까?’ 12개를 적어 목사님께 가져갔더니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이 대단히 중요한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겸손이라고 할 때 프랭크린은 겸손을 덕목에 추가하여 매주 한 가지씩 실시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13가지 덕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절제 : 과음, 과식은 삼간다.

침묵 : 타인에게나 나에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규율 : 모든 물건은 일정한 위치를 정해 놓고 정리하고, 일도 시간을 정해 놓고 진행한다.

결단 : 해야 할 일은 실행할 것을 결신하고 결심한 일은 꼭 실행한다.

절약 : 타인에게나 자신에게 유익한 일을 모색하고 낭비하지 않는다.

근면 :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 언제나 유익한 일에 힘을 쏟아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성실 : 타인에게 폐가 되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정의 : 타인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중용 : 생활의 균형을 지켜 화내기 않으며, 타인에게 관용을 베푼다.

청결 : 몸과 의복, 주변 환경을 불결하게 하지 않는다.

평정 : 하찮은 일, 피하고 싶은 일이 생겨도 평정을 잃지 않는다.

순결 : 타인의 신뢰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행동을 피한다.

겸손 :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본받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지극히 낮추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곧 “주”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낮아지면 높아지는 원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솔로몬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24)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12: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마음인 겸손의 마음을 품어서,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성도가 성도다워지고 가정이 행복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