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미래신문)
카이퍼와 이승만은 서로 다른 시대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했지만, 여러모로 닮은 곳이 많다. 둘 다 대 정치가이고 저널리스트란 점에서 유사하다. 그리고 둘 다 처음부터 언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신문을 발간하고, 대중 매체를 통해 국민을 깨우는 운동에 힘쓴 것이 엇비슷하다. 화란계 미국인 저자 반덴벍(Van den Berg)은 헤라우트지에 게재된 카이퍼의 글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영적인 깊이, 지성적인 넓이, 단순 명료함, 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타는 헌신이 나타나 있다」고 했다.
카이퍼는 타고난 언론인이었다. 특히 그는 화란 문학의 귀재였다. 라이덴 대학교 재학시절에 그는 문학과 신학을 함께 공부하여 두 가지 학위를 얻었다. 그래서 그는 25세 때 <칼빈과 존 라스코의 교회론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그는 신학뿐 아니고 수사학의 천재이기도 했다. 수사학(Rhetoric)이란, 말과 글을 가지고 가장 논리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학문이다. 4세기의 어거스틴, 16세기의 요한 칼빈도 수사학의 명수로 매일 같이 글을 쏟아낸 것처럼 카이퍼도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다. 거기다가 그는 독서광이었다. 성경을 비롯해 교부들의 책, 종교 개혁자들의 책, 교회사, 정치와 문학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또 카이퍼는 김나지움에서는 영어, 독일어, 불어를 배우고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완성했고,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카이퍼는 1872년 일간지 <더 스탠다드(Staandard)>의 편집인이자 주필이 되었다. 더 스탠다드 지는 불란서 혁명이 인본주의 사상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알리면서 이에 반해서 하나님의 중심의 세계관으로,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과학 등을 다루면서 그가 임종하던 1920년까지 약 50년 동안 필봉을 휘둘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간지 헤라우트(Heraut)의 주필도 겸했다. 스탠다드와 헤라우트는 카이퍼의 입이자 손이었다. 그리고 세속화되고 인본주의적이고 자유주의로 넘어간 정치와 교회를 바로 잡기 위해 민중을 깨우는 것은 신문의 역할이 가장 컸다. 19세기 계몽주의의 암울한 시대에 그는 자유주의를 공격하고, 모든 국민을 성경 적인 세계관으로, 하나님의 중심의 세계관으로 돌려놓는 유일한 수단은 글로써 평범한 대중들을 쉬운 말로 깨우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50년 동안 일간지와 주간지의 편집주간으로 매일같이 논설과 칼럼을 쏟아내고, 거짓된 사상을 비판하고 국민의 갈 길을 제시했던 것은 확실한 기독교 세계관과 문장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또한 그의 논설과 칼럼은 곧 그의 칼빈주의 사상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일대기를 보면 <카이퍼는 그가 숨을 거두고 임종하는 순간에 손에서 펜이 떨어졌다>고 했다. 또 그는 심포지움이나 컨퍼런스, 또는 국경일 등에서 연설을 맡으면 반드시 30~40페이지의 소책자를 만들어서 민중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 작은 책들이 모여서 방대한 책이 되곤 했다. 그래서 카이퍼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책을 223권을 썼으니 가히 작은 도서관을 만든 셈이다.
내게는 1901~1905년 사이 카이퍼가 수상 시절에 설교와 연설, 대담 등 육성 테이프가 있다. 약 40년 전에 화란 국영방송 PD를 통해서 카이퍼의 육성 연설을 구할 수 있었다. 테이프의 시대가 가고 CD 시대를 거쳐 지금은 USB 시대가 되어 컴퓨터에 잘 보관하여 시간이 될 때마다 잘 듣고 있다. 카이퍼는 168cm의 작은 키에 딱 벌어진 어깨에 모든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천둥 같은 음성을 가진 소유자로, 굵은 바리톤에 명쾌한 논리가 일품이었다. 사람들 중에는 글을 잘 쓰면 말을 잘못하고, 말을 잘하면 글이 안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카이퍼는 말과 글이 늘 같이 가고 말과 글이 들어가는 곳에 세상이 변하고 가정과 교회가 변하고 정치가 변했다.
우리 초대 대통령 이승만(Rhee Syng Man) 박사도 그의 학력, 실력, 그의 문필 그의 독립사상이 카이퍼와 견주어봐도 손색이 없다. 이승만도 저널리스트로 시작했다. 그 시대에 변변한 신문도 없었고, 인쇄기도 마땅치 않고 더구나 일제강점이 시작되자 편집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주필로서 <한성회보> <매일신문>을 통해 고난받는 백성들의 사정을 알리는 일을 했다. 더구나 옥에 같이 있는 동안 참 종이에 글을 써서 노끈을 만들어 옥 밖으로 내보내는 모험을 했었다. 특히 그가 쓴 <일민주의> <일본 내막기; Japan inside out) 같은 책은 예언서가 되었다. 최근에 1942년에 단파 방송(VOC)을 통해 2300만 동포들에게 자유 소식, 자유 메시지는 80년 전의 라디오로 우리 국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주었고 지금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이승만은 <워싱턴 포스트> <타임지> <데일리 뉴스> 등 언론을 이용할 줄 알았다.
최근 상영된 <기적의 시작> <건국 전쟁>도 따지고 보면 불순세력의 왜곡으로 부서진 팩트 조각을 다시 복원한 것이 많다. <역사를 버리는 민족은 힘이 없고, 역사를 지킬 줄 알아야 희망이 있다>. 카이퍼와 이승만은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만날 수 없었지만, 카이퍼가 주필로 있던 Staandard 지에 뜻을 이루지 못한 이준 열사 일행에 대해 대한민국 사절단을 동정하며 <비극의 코리아>라는 말을 쓴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위기에 처해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자유대한민국을 물려주려면 카이퍼와 이승만 같이 국민을 깨우고 계몽하는 참된 저널리스트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