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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만이 우리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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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의 주(主)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에 소망이 되십니다.
2. “십자가를 참으사 구원을 다 이루셨기에” 소망이 되십니다.
3.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소망(히12:2-3) 

 

심리학자들이 쥐로 실험했습니다. 독 안에 쥐를 집어넣고 빛을 완전히 차단했을 때 쥐는 30분밖에 생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빛을 계속 비춰주니 36시간이나 생존했습니다. 캄캄한 독 안에서 30분 만에 죽은 쥐는 체력이 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하여 죽었습니다.

나치수용소의 처참한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그의 저서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에서 “나치수용소의 말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 비인간적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희망은 생존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이 땅에서는 무엇인가를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소망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소망삼고 살고 계신가요?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예수를 소망하면서 기대하면서 바라보아야 합니까?

 

1. “믿음의 주(主)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기에 소망이 되십니다.

 

2절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하십니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1) 믿을 근거 즉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믿을 근거가 되는 이유는 변하지 않으시는 참된 분(진리)이기 때문입니다(요 14:6). 이 세상에서 어느 무엇도 변하고 쇄하고 늙고 추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믿을 만한 참된 분입니다. 예수님이 참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도 참되고 믿음의 대상이 되십니다.

 

2) “믿음의 주”란 믿음을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믿음을 가질 능력이 없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으니까요(엡 2:1). 그런데 예수님이 거듭나게 하셨고, 또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믿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씀은 마 16:7과 요 3:3과 고전 12:3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3) “믿음의 주”란 믿음을 붙들어 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사탄이 베드로의 믿음을 뺏으려고 밀 까부르듯 할 때 “예수님이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눅 22:31~32)” 하였고, 요 17:11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대상들의 믿음을 보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또 “악에 빠지지 않도록 보전하신다(요 17:15)”고도 하셨습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믿음을 보전한다”는 뜻은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쉬지 않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수를 ‘주님’이라고 호칭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노력과 경력과 의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믿음 없이 살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부르셨고 말씀을 통해 언약하시면서 믿음을 주셨습니다.

창15장에 하나님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라 하시면서 저 별들처럼 너의 자녀들도 창대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갖게 되었고 고백하기를 “여호와는 없는 가운데 있게 하시고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므로 하나님께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았고 결국 믿음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베드로를 보세요.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에 바람과 풍랑이 있어 새벽에 찾아 오셨고 문제인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셨으며 그러므로 베드로는 주님께 “나는 죄인오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의복이 더러워졌을 때 세탁을 하면 많이 온전해집니다. 또 집도 오래된 집이면 새로 지어서 온전케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타락한 상태에서 죄 사함 받고 예수님을 닮은 자로 변화시킬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온전케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전케 하는 방법 중 대표적인 방법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거듭나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2) 속죄하여 주십니다.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심판을 면하는 것이지요.

3) 말씀으로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요 17:17). 성도가 성경 말씀을 잘 지키면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도가 말씀을 잘 지키도록 역사하십니다(요 16:13, 17:6).

따라서 거듭나는 것은 정신적 변화이고, 속죄의 은총은 하나님과 화해하여 심판을 면하는 것이며 말씀으로 거룩하여지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방법으로 성도를 온전하게 만들어주십니다.

 

딤후3:16절에도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시23:1절에 “여호와는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아브라함을 다윗을 바울을 온전케 하셨습니다. 아니 저와 여러분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나로 인하여 누군가에 의하여가 아닌 주님으로 인하여 온전케 하시니 진정 우리의 소망 열방의 소망이십니다.

 

 

2. “십자가를 참으사 구원을 다 이루셨기에” 소망이 되십니다.

 

2절 중반 절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아담이 처음 범죄 한 후에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또 자신의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을 가렸습니다. 아담과 이브 사이에 죄가 개입되기 전에는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감추고 속일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속이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기변명과 핑계 대기에 바빴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와 부자간에도 참 사랑을 하지 못하고 감출 것이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다행이련만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다투다가 돌아서면 이상하게 그런 자기가 못? 예수님은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흔히 보아온 예수님의 초상이나 조각에는 이마에만 작은 핏자국이 흐르고 속옷을 입은 깨끗한 모습이지만 그 실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묘사한 것뿐입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으셨습니까? 왕 노릇 하는 흉내를 내게 하였고, 그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으며 먹지 못할 쓴 포도주와 신 포도주를 입에 대주면서 “너희 아버지 하나 보이기 시작합니다. 아니 자신이 오히려 가장 싫고 미워집니다. 남들 앞에선 아무리 좋은 옷, 고급차, 교양, 지성, 가진 돈으로 치장하려 해보아도 자기 속 깊숙이 숨겨져 있는 열등감과 수치심을 지울 길이 전혀 없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잘 알다시피 인간이 고안해낸 형벌 중에 고통이 최고로 심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었고 이사야 선지자는 산 채로 톱에 켜서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금방 혼절(昏絶)해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극심한 고통도 잠깐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그런 고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쇠 조각이 붙은 가죽 채찍을 물에 적셔 맨 살에 내려칩니다. 멜 깁슨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핏줄이 터져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됩니다. 죄수로 하여금 철저하게 자신의 무력감을 느끼게 만들고 보는 사람으로는 로마제국에 항거할 꿈도 못 꾸게 만들 목적입니다.

 

또 죄수더러 자기가 달릴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게 합니다. 스스로 율법에서 규정한 저주스런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자괴감을 느끼도록 하고 예루살렘 전 시민들의 조롱거리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손바닥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박고 무릎을 꺾어버립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통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극심한 고통이 따로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눠가졌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상적 의상은 겉옷과 속옷과 허리띠와 샌들 네 개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대 편제상 십자가를 숙직하던 분대는 네 명이 한 조였습니다. 네 명이 제비를 뽑아 네 가지 옷 중에 어느 것을 차지할지 정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 됩니까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나 보라”고 하면서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사실은 누가 올라가야 합니까? 바로 우리 자신 아닙니까? 그럼에도 아무 죄 없으신 그분을 온갖 조롱과 멸시를 퍼부으며 달아맨 자가 바로 인간들입니다. 그럼 십자가에 수치스런 모습으로 달린 주님과 밑에서 조롱하는 우리 중에 누가 더 진짜 부끄러운 자입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 저들이 자기의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빌었지 않습니까?

 

십자가의 인내를 통해서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사야 53장에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렇습니다. 예수 안에 진정 죄 사함과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3.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십니다.

 

2절 하반 절에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것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셔서 천국에 들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천국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모든 자의 신앙의 목적이며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되시기에 충분합니다. 그 이유는

1) 본향으로 가셨기 때문이고, 2)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지위에 자리 잡으신 것이며,

3) 또 심판자의 자리에 계신 것이고,

4) 무엇보다도 구세주로서 중보자 역할을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히 3:1에 보시면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이 곧 중보자의 직임입니다.

 

우리의 결국 포기 할 수 없는 것은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눈물도 한 숨도 고통도 죽음도 없는 곳입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저 넘어 더 나은 곳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았다. 그 때 얼굴에는 광채가 나타났고,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보시던 주님은 앉아 계실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셨다.(행 7:55) 예수를 바라보는 자는 순교도 할 수 있습니다.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승리의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만 소망삼고 바라보는 데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했던 것에 대하여 실망하거나 실족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결코 세상과 사람은 만족을 주지를 못합니다. 예수만이 진정 우리와 열방의 소망이십니다.

예수를 앙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눈, 영의 눈을 예수님께 집중하여 예수께 초점을 맞추어 사시기를 바랍니다. 왜요? 그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시오, 십자가를 참으사 온전한 구원을 이루셨으며,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중보자적 사역을 통하여 소통의 삶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찬송가 ‘예수 열방의 소망’에서 “예수 열방의 소망 예수 우리의 위로자 주는 온 땅의 영원한 소망..., 찬송가 488장에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우리 주 예수 밖에는 믿을 이 아주 없도다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시사미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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