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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크리스챤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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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 스타일   

 

성경:빌립보서1:27~2:8   요절:빌립보서1:27

 

   얼마전 싸이씨가 부른 강남스타일이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서울 강남이 아주 유명해 졌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스타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요즘은 스타일의 시대입니다. 강남스타일, 아메리칸 스타일, 신세대 스타일, 복고풍 스타일, 페션스타일, 헤어스타일등 참으로 다양한 스타일이 있습니다. 헤어스타일만 봐도 다양합니다. 옛날에는 빗으로 단정히 빗어 머리카락이 하나라도 흐트러지지 않고 질서 정연하게 고정되는 것이 신사의 멋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자다가 일어난 꺼벙한 머리 스타일부터, 인디언 추장같은 머리스타일, 바리깡으로 한쪽을 밀어 버린 쥐가 파먹은 것 같은 스타일도 유행합니다.

 

헤어스타일은 한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지만 라이프스타일은 한 사람의 운명을 만듭니다. 헤어스타일은 미용실의 미용사가 만들어주지만 라이프 스타일은 철저히 자기가 스스로 만들어 갑니다. 헤어스타일은 마음먹은 대로 쉽게 바꿀 수 있지만 라이프스타일은 한 번 형성되면 쉽게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라이프스타일을 요구하십니다. 크리스찬이라면 크리스챤다운 스타일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크리스챤 스타일 그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깍은 스님이 대낮에 갈비 집에서 갈비를 뜯는 다고 해도 사람들은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신부님이 식당에서 소주잔을 비우고 있어도 별반 상관치 않습니다. 그런데 TV나 신문에 기독교인의 이름이 오르내리면 사람들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사뭇 비판적인 독설을 퍼붓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크리스찬에 대한 기대치가 그만큼 높다는 것입니다. 워낙 말썽만 피우고 못돼먹은 짓만 하는 자식은 잘못해도 그러려니 하지만 철석같이 믿었던 모범적인 맏아들이 잘못 하면 부모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만큼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크리스찬은 뭔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믿음의 선배와 교회들은 그렇게 역사적으로 인류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쳐 왔습니다. 그러면 크리스챤 스타일은 무엇입니까? 이 주제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오늘은 본문 말씀 속에서 제시하는 크리스챤의 삶의 스타일을 배워보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1.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크리스챤의 삶의 스타일을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는 것입니다.(빌1:27) 둘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도 기쁨으로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혀려 함이라”(빌1:29) 한마디로 말하면 「한마음」 「고난」 이라는 단어로 표현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2장에서는 과연 우리 크리스챤들이 어떻게 한마음을 품고 주를 위해 고난을 감당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인가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2.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으로 한마음을 품으라

다같이 2: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1절 말씀을 통해 볼 때에 빌립보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이나 사랑이나 위로나 성령의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나름대로 풍성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그들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개인 신앙은 아주 뛰어났습니다.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들이 이런 장점이 있거든, 이런 훌륭한 점이 있다면, 이제 혼자 놀지 말고 서로서로 동역자들 끼리도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같은 마음(same mind), 같은 사랑(same love), 같은 뜻(same will), 즉 one spirit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같은 사랑으로 구원받은 한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을 배우기 원하는 같은 소원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온 한 동역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고자 하는 한 뜻을 위해 부름 받은 신앙의 동지들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아껴주고, 서로를 위해 주고, 콩 한쪽도 나눠먹고, 같이 울고, 같이 웃는 그런 형제자매가 되어야지 않겠습니까?

 

개인의 주장과 개성을 중시하는 오늘날에 있어서 이 동역과 합심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크리스챤 스타일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이요, 갈등이 아니라 평화이고 개인주의가 아니고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왜 우리 크리스챤들은 마음을 같이하고 한 마음 한 뜻을 품어야만 합니까? 그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가시 면류관쓰시고 발에 대못이 박히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벽을 허무시고 용서와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좌우 손바닥에 대못이 박히시고 그 몸에 채찍질을 당하시며 사람과 사람사이에 반목과 질시를 허무시고 손을 잡아 주시며 화평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사랑과 평화 이것이 십자가요 이것이 크리스챤 스타일입니다.

 

3.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으라

미국 클린턴 대통령 시절 그의 퍼스트레이디였던 힐러리 여사에 대한 기사가 뉴욕 타임즈에 실린적이 있었습니다. 이 기사는 타드볼튼이라고 하는 신문 기자가 그녀의 변화하는 모습을 추적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사에 나타난 힐러리는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힐러리는 그 당시 무척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전문적인 직장 여성으로서의 자기만의 개성이 아주 강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82년에 힐러리는 남편을 주지사로 당선 시키기 위해서 안경을 벗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인상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성을 고집했다가 마침내 남편의 성으로 바꾸었습니다. 강한 개성을 포기한 것입니다. 1992년에는 남편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머리띠를 풀어 버렸습니다. 머리띠는 직장 여성의 이미지였기에 그것도 버린 것입니다. 변호사였던 그녀는 전문직 여성의 이미지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후로는 앞치마를 두르고 과자를 굽는 평범한 주부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1995년 새해를 맞아서는 여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동안 대통령인 남편의 자문역을 맡아왔는데, 이것이 오히려 그에게 손해를 끼쳤습니다." 이 말로 힐러리는 자신의 자존심 마져 버렸습니다. 힐러리가 안경과 성과 머리띠와 자존심마저 버린 것은 남편을 위해서였습니다. 남편을 성공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아끼고 고집하던 것들을 버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힐러리의 모든 인생의 목적은 남편의 성공에 집중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른 것들을 포기 하는 것이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힐러리에게 있어서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힐러리의 이러한 삶의 태도는 하나님께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성도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들의 모든 것들을 기꺼이 포기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귀한것일지라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생명을 내놓기도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 가장 큰 기쁨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이 자랑이고 영광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골로세서1: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구체적인 삶은 바로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자기를 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협력하여 주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헌신해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하여 자기 아들의 피값으로 교회를 샀습니다.(행20:28) 그 교회를 우리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하여 하나가 되고 고난을 받는 것은 우리 크리스찬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우리 크리스챤 스타일입니다.

 

4.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우리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낫게 여기고 섬기야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앎니다. 그런데 막상 실천하려고 하면 잘 안됩니다.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지위에 걸 맞는 권리를 주장하고 그 권리를 어떻게 해서든지 누리기 원합니다. 다투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 자기본위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남편인데 왜 내가 방 청소를 해야만 하는가?” “나도 맞벌이 주부인데 왜 나만 집안 일을 해야 하는가?” “내가 전도회 임원도 아닌데 왜 짐을 져야 하는가?.” 이처럼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근본이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이요, 그리스도의 마인드인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자 노력할 때에만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고, 마음으로 동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아가 십자가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마지막까지도 원수들을 대적하시지 않고 십자가에서 말없이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다 품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영접하시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고, 그 고난으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사람도 이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과 희생앞에 고집과 혈기와 욕심을 꺾고 고개를 숙이고, 마음이 온유해집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헌신하신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는 어떤 희생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또 품다 보면 나의 삶의 사타일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것이 크리스챤의 스타일이고 이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스타일의 삶을 추구 하고 있습니까? 이번 주는 이웃사랑 바자회가 있습니다. 바자회를 섬기면서 우리 크리스챤 스타일이 잘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내 인격속에 깊이 스며들어 진정한 크리스챤 스타일을 만들어 갈 수 있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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