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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카이퍼와 이승만(10) (기독교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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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지금까지 카이퍼 박사와 이승만 박사를 비교 관찰했다. 앞서 말한 대로 카이퍼와 이승만은 지구 반대편에 살았지만, 그들의 인물됨과 정치가, 설교가, 연설가로서 또는 저널리스트로의 삶을 살펴보았다. 이승만은 카이퍼와 직접 만난 일은 없어도 간접적으로 카이퍼의 칼빈주의적 세계관을 접했고 그의 신학을 이해했다고 썼다. 이승만이 프린스턴 신학교에 몸담고 있을 때는 ‘모든 교수와 학생들이 카이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사람은 결국 누구와 만남이 있었는가? 또는 누구의 사상을 접했는가? 에 따라 인생의 향방이 정해지는 것은 정한 이치다.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가 살던 유럽, 특히 화란은 혼란의 시대였다. 우선 19세기는 자유주의, 과학주의, 진화론으로 교육이 망가졌고, 특히 교회가 병들었던 때였다. 본래 화란은 개혁교회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1618~1619년에 이르는 6개월 동안 이른바 돌트총회(Dordt Synod)가 열렸다. 자유주의 운동의 진원지인 라이덴 대학의 교수들이 일찍이 종교개혁자 요한 칼빈의 신학과 신앙체계를 뒤엎고 새로운 신학을 발표했다. 그러니 신학자들의 소리에 민감했던 목회자들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데로 그대로 설교했었다. 

 

이에 개혁주의 신앙을 바로 지키려던 지도자들은 국제기독교 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에 대표를 보낸 나라는 네덜란드,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 등의 당대 최고의 대 신학자들이 6개월 동안 154회 회의를 거쳐 개혁주의 신학을 확고히 했다. 그 시기에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생기지도 않았고, 프랑스 국왕은 대표단의 참여를 막았다. 이런 가운데 세워진 네덜란드 교회를 가리켜 <갱신교회(Hervormed Kerk)>라고 했다.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을 따르는 교회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갱신교회는 점차 힘을 잃고, 19세기에 와서 독일과 프랑스에서 밀려오는 사상으로 흔들렸고, 무신론적 사상과 성경해석을 자연 과학적, 분석적으로 해석할 뿐만 아니라 진화론적 세계관으로 교회 강단은 점점 자유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19세기의 자유주의(Liberalism)를 막아내려는 시도를 한 나라는 별로 없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영국과 미국의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복음을 지키려는 학자들은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로 몰렸고, 복음을 바로 지키려는 자들은 소수에 그쳤다.

 

그런데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의 경우, 베이스트교회에서 확실한 칼빈주의자로 거듭나면서 우트레흐트(Utrecht) 중앙교회를 거쳐 암스텔담(Amsterdam) 새 교회를 담임하면서부터 그는 교회개혁의 깃발을 들게 된다. 그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교회에 대해 강력히 대처하고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보존하는 교회를 세우자!”라고 역설했다. 결국 뜻을 같이 하는 목사들과 성도들은 자유주의 신학과 신앙 노선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카이퍼는 말 그대로 개혁교회(Gereformeerd Kerk)를 세우게 된다. 한국말로는 <개혁교회>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은 <재개혁교회>라는 뜻이다. 즉 ‘다시 한번 더 종교개혁을 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히 교회만 새롭게 개혁했다는 뜻이 아니고,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 개혁주의 사상을 적용하여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삶 전부가 기독교적 세계관, 성경적 세계관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카이퍼의 이러한 주장은 정치가, 의사, 교수, 법률가도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갖는 <기독교 입국론>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세상은 악한 영이 지배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신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목표>로 하며 살아야 한다. 헬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 교수의 말처럼 동심원 가운데, 가운데 원이 교회라면 바깥 원은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다. 즉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중심(지휘본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자체만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컨트롤타워(Control Tower)라고 할 수 있다.

 

자유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도 따지고 보면, 이 나라를 기독교적인 진리 위에 세워 국민이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특히 이승만은 기도의 사람으로 6.25 전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부산 초량교회로 피난 온 목사들에게 “나라를 구해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건국 때도 이승만은 기도로 시작했었다. 그뿐 아니라 전쟁 중에 각 부대를 순방하고 장병들을 위로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줄 수 있는 군목(軍牧)이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고 <군목제도>를 만들었다. 드디어 1950년 12월 21일, 대통령 비서실 지시 제29호로 군종제도의 문을 열어 군 복음화와 민족 복음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또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평생을 독립운동과 건국 운동에 몸 바친 분이다. 그는 해방 후 공산세력에 의해 위기에 처해 있을 때(사회주의 지지율이 70%를 넘고 있었음),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을 건설했다. 그 후 공산군의 6.25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망가진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했고, 미국과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해서 오늘의 번영된 자유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다. 그리고 이승만의 건국 정신으로는 자유민주주의, 한·미 동맹, 기독 입국론, 자유시장 경제라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기초로 하여 지금의 세계 10위 국가로 가는 방향을 제시했다. 

 

아브라함 카이퍼 박사도 이승만 박사도 동양과 서양이라는 서로 반대편에 있었지만. 탁월한 신앙과 정치력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기독 입국>으로 세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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