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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은 고통을 이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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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말씀: 요한복음19:25~27 요절:요한복음19:26

 

어려울 때를 지날 때 예수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간증이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단조로운 삶에서 간증될 만한 사건을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영업 하시는 분들과 많은 분이 어려움을 겪고 경제적 상황이 악화 일로에 있습니다.

기도가 절실해집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5:7) 염려를 맡기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목회자인 저로서도 예배를 드려야 할 시간에 텅 빈 예배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염려가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늘 사람 만나는 것을 기뻐하고 사람을 만나면 악수하고 인사하고 밥을 먹고 전도하고 권면하는 것이 목회자의 천직입니다.

 

그런데 입에 마스크가 씌워졌습니다. 사람을 즐겁게 만나지도 못하고, 교회 오라고 전도도 못 하고, 목 터지라 설교하고 집회도 못 하니 참으로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일손을 놓고 전전긍긍하는 성도들과 진정된 기미도 보이지 않고 전국으로 더 확대되는 코로나19 사태를 지켜보며, 또 이런 와중에도 415총선을 앞두고 자기들의 정치적 당략에 이합집산하며 물어뜯는 한심한 정치권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프고 답답합니다.

 

열심히 일할 때 보다 더 피곤하여 잠도 오지 않고 소화도 안되고 입술만 터졌습니다. 목회자인 저도 이럴 지경인데 성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기에 성경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회복은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잃어버리고 손해 본 것을 다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인생에 바람이 불 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사인입니다.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을 붙들었더니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걱정하고 염려에만 싸여 있을 것이 아니라 상황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나라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열강의 틈바구니에 놓여 있습니다. 서쪽으로 중국,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일본, 동해 먼바다 건너 미국까지 우리는 외부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는 민족입니다. 자세히 보면 우리는 무엇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일하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빠른 기독교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한국에 있고 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문호를 개방하고 한국인들을 환영했습니다. 베트남은 형제의 나라라고 태극기를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되자 세계 많은 나라가 약속이나 한 듯이 등을 돌리고 한국인의 입국을 거부하였습니다. 우리는 중국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해도 의사들이 중국인 입국을 제한해야 한다고 해도 그래도 문을 개방하고 우호적으로 대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되레 중국이 먼저 문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연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도 늘 주변 나라들로부터 호의적이기보다 호전적인 대우를 받았습니다. 갑자기 외톨이가 되어 버렸으며 본국이 힘이 없으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살아가는 교포들이 마치 벌레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사는 나라이고 민족입니다. 다 떠나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면 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았을 때 우리는 살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축복으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허영심과 자만심이 우리 안에 파고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물질주의와 인본주의 쾌락주의에 빠져 예배를 등한히 하고, 하나님을 등한히 하고,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버렸습니다. 정치하는 이들은 교만하고 거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반하는 정책을 만들고 입법화하고자 합니다.

 

역사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고 대적한 모든 나라와 개인들은 멸망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겸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이 살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마음을 겸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나라가 하나님 앞에 겸비할 수 있는 민족이 되도록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경을 제 맘대로 우롱하며 교만을 떨었던 이만희와 신천지를 하나님께서 그 수치를 백주 대낮에 만천하에 드러내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라든 개인이든 누구든 하나님을 대적하고 높아진 것들은 회개치 않으면 이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다시 한번 붙잡아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하신 말씀 중 세 번째로 하신 말씀을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면서 육신의 어머니를 염려하고 요한에게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이 주님의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성령의 음성으로 듣는 시간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님이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요셉에게 오해를 받고 파혼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한 너무 가난하고 힘이 없어서 맏아들을 마구간에서 해산해야 했습니다.

 

또 헤롯 왕의 군사들을 피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피신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자기 가족들 때문에 베들레헴에 수많은 아이가 살해되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을 때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부터도 마리아의 가슴을 칼로 후비는 날이 날마다 계속되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에는 예수님에 대한 온갖 비난과 심지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지폈다는 소문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기도 했고 잡아 죽이려고 했던 숱한 현장을,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켜봐야 했습니다.

 

모친 마리아가 정말로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반역죄의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으니 그 어머니의 가슴은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는 정말 심장이 터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마에 가시 면류관이 짓눌려 선혈이 낭자한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이 걸음마를 시작할 때 잡아 주었던 그 손이 대못에 박히는 것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십자가에 죽어가는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달려 죽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아들의 죽음 앞에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흐느끼는 모친 마리아에게 예수님은 무엇이라 부릅니까? “여자여!” 이 말은 깊은 의미를 던져 줍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처 표적이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입니다.

표적이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기적을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모친을 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든 공생애를 마치며 마지막 죽는 순간 또 모친 마리아를 어머니 대신 여자여! 라고 부릅니다.

 

여기엔 깊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첫 사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뱀의 유혹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고 죄를 범하였을 때 뱀을 저주하며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첫 구원의 언약을 주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여기서 너는 뱀 즉, 사단을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사단의 머리통을 박살 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은 사단이 예수님의 발꿈치를 무는 정도의 상처를 주지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사단의 머리통은 박살이 나서 그 권세는 꺾이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이시기에 여자의 후손이라고 일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 모친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지 않고, 모친 마리아의 구원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마리아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을 육신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단지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육신의 아들로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어찌 그 고통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과 절망으로 괴로워하는 중에 십자가 위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엄청난 고난을 받는 것을 믿었습니다. 마리아는 원수들의 분노함이나 그 광경에서 풍기는 공포감에도 불구하고 주저하지 않고 십자가 앞에서 아들의 죽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울부짖으며 실신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놀랄 만큼 침착하게 십자가 곁에 서 있었습니다.

 

칼이 가슴을 찌르는 모든 고통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끝까지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마리아는 육신의 모정을 극복하고 구세주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더 크고 놀라운 비전을 바라보며 모든 아픔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여자여! 라는 주님의 음성이 마리아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그녀는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성모로서의 사명을 자각했던 것입니다. 성모로서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면 끝까지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사명은 그 어떤 고통도 참고 견디게 합니다. 이것이 사명 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가 겪는 고통과 아픔은 마리아가 겪는 아픔보다는 그래도 견딜만한 아픔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겪는 당사자는 누구의 아픔과 시련보다 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단지 한 인간으로 죽는 것이라면 그 억울함과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이 있었기에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모친 마리아도 단지 자기의 아들로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다면 수없이 기절하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작금의 사태 앞에서 상황 속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이 속에 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의 사명을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명은 육신의 한계와 고통을 뛰어넘게 합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신분을 지킬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로 살아야 하는지,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위해 어떤 것을 감내하고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지 깨닫는 여러분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염려하고 웅크리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돌이키고, 결단하고, 기도하고, 헌신하는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웃을 돌아보고 섬기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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