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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의 징조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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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기 상황을 맞이한 아하스에게 주시는 메시지 (1-9절)
2. 믿음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는 아하스 (10-13절)
3. 임마누엘, 구원의 징조를 보여주심 (14-17)

임마누엘의 징조와 은혜(사7:10-17)

 

입동이 지나고 겨울의 문턱에 와 있습니다. 힘든 과정을 거처 삶일지라도 공기와 물 그리고 태양의 혜택을 누리고 사는 저희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 사랑과 은혜로 산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떤 권사님의 간증을 들어보니 “저는 요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연합군들에 의해 위기에 처한 남유다 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징조를 구하라고 할 때, 아하스 왕이 불신앙으로 거부하지만, 그를 책망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친히 ‘임마누엘’의 징조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은 대화 형식의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말씀하시고(10-11), 아하스 왕이 대답하며(12),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아하스에게 예언을 전달하는 형식과 내용(13-17)으로 대화들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은혜와 소망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위기 상황을 맞이한 아하스에게 주시는 메시지 (1-9절)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고 울부짖게 될 것입니다.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그리고 유다를 치러 동맹한 그 나라들이 “65년 내에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는 앗수르에 의한 이스라엘의 패망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시면서 그 백성들에게 한 가지 조건을 명하십니다. 견고한 믿음입니다. 절망 가윤데 한줄기 빛과 같은 소식입니다.

 

당시 이 메시지를 들은 아하스는 친 앗수르 정책을 펼쳐 앗수르의 종교 행태를 배워 실행하고 성전의 각종 규례들을 앗수르 왕을 위해 제멋대로 고치고 만든 패역하기 짝이 없는 왕이었습니다(왕하16:9-19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마치 의로운 왕에게나 주실 소망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행사는 사람의 평면적 논리로는 전혀 납득되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직 선행만 행한 자들을 대우하듯이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이해의 열쇠는, 당신의 기뻐하심을 따라 택한 사랑하시는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 열심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 견지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

 

지금 너무나 강하고 무서운 세력이 자기들을 삼키려고 코앞에까지 와 있는 상황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혀서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위급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전혀 두려워하지 말고 그 대신 믿음에 굳게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현실은 아주 다급한 상황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아하스는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상황에 닥치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2.  믿음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는 아하스 (10-13절)

 

열왕기하 16장이나 역대하 28장을 보면, 아하스는 악한 왕입니다. 최고로 악한 왕입니다. 손자 므낫세와 더불어 남 유다의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바알 신상을 만들고 우상 숭배를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불에 태워서 제물을 바치는 이방의 몰렉 신앙까지 수입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아들을 불에 태워 죽이면서 제물로 바칩니까? 너무 끔찍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하스의 아버지는 요담이고 요담은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요담의 아버지는 웃시야인데, 나중에는 자기가 제사장 노릇을 하려고 하다가 나병이 걸려 폐위되었지만, 원그 전에는 선한 일을 하던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왕인 할아버지와 아버지 밑에서 최고로 악한 아들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영향은 받지만, 결국은 자기 스스로의 결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그렇게 악한 아하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말씀을 주십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11절)

 

아하스가 잘 믿지를 못하니까,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도 보여줄 테니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아주 최소한의 믿음만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큰 자비와 은혜입니까? 그렇게 악한 사람인데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말씀에 대해 아하스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12절)

 

이 구절만 따로 보면 굉장히 경건한 신앙인의 말처럼 들립니다. 신명기 6:16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이 말은 믿음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실 그의 불신앙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지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살펴보면 이것이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보다는, 당장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 아람과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는 세력, 즉 강력한 나라 앗수르에게 기댈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아하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징조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앗수르 왕에게 잘 보여서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을 물리쳐주도록 할까에 정신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초청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그것을 거부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안 하겠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감동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우시게 만드는 일이라고 이사야가 선포합니다.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13절)

 

여기에 보면 이사야는 아하스를 가리키면서 “다윗의 집이여”(13)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하스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남 유다 왕들은 모두 다윗의 후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는 전혀 다윗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말입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그 유명한 14절입니다.

 

 

3. 임마누엘, 구원의 징조와 은혜 (14-17)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4절)

 

여기에서 “너희”라는 말은 다윗의 집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700년 후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다윗은 물론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큰 죄도 범했습니다. 간음죄를 짓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살인죄까지 저질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본적으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 그것을 지적받았을 때 바로 그것을 깨닫고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서 회개했습니다. 늘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자 애썼습니다.

 

아하스가 핏줄로는 분명히 그러한 믿음의 사람 다윗의 후손이지만, 다윗의 믿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믿음을 이어가는 다른 자들에게 징조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는 징조입니다.

 

아하스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메시야의 오심을 선포했습니다. 14절“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실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이 것을 이중적 예언이라 합니다. 첫째로 아하스 시대를 향한 예언이요 둘째는 수백 년 후에 이 땅에 오실 임마누엘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오시는 이 놀라운 예언이 하필이면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아하스 왕에게 최초로 선포될 수 있습니까? 인간이 받은 은혜의 선물 중에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오신 일입니다. 하물며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신다는 가장 크고 은혜로운 예언을 어떻게 하나님을 불신하며 바알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는 아하스에게 할 수 있습니까? 오히려 메시야가 오신다면 모든 인간들이 깨끗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고 몸부림칠 때 오셔야하는 것이 아닌가요? 모든 백성들이 영적으로 깨어있고 각성해 있을 때 내려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통치자는 헤롯대왕이었습니다. 그는 동방박사들로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소식을 듣고 자신도 그를 경배할 테니 장소를 알려달라고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잔혹한 헤롯은 베들레헴 지역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 수천 명을 살해합니다. 자신 외에는 그 어떤 왕도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분은 죽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천하고 악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착하고 선한 자와 함께 거하기 원하지만, 임마누엘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들이 깨끗하고 의로울 때, 정직하게 살려고 무던 애를 쓸 때,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러워지고 타락해서 아무런 소망이 없을 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이 임마누엘의 약속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동일하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미 신약 시대 초기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공생애 및 십자가와 부활 등을 통하여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 위한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키셨을 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꾸준히 그의 백성과 자녀들을 위해 임마누엘의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자녀들이 평안하고 즐거울 때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고통과 절망과 시련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에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의 은총은 성도들이 땅 위에서 사는 동안 꾸준히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살다가 천국에 이를 때까지 조금도 중단되지 않은 채로 계속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몹시도 힘들고 어렵습니까? 정말 기억도 하기 싫고, 내 인생에서 지워버렸으면 하는 한 해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고 싶은 이 크나큰 아픔과 고통을 기억하시고, 그 속에서 임마누엘의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에녹에게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보여주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우리 주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무려 700여 년 전에 메시아에 대해 정확히 주신 이 말씀입니다. 위기에 처하여 떨고 있는 비록 악하고 불신앙적인 왕, 오히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아하스에게 위로와 구원의 계시를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구원이시고 임마누엘이신 예수께 오십시. 그리고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누리십시오.

 

하나님은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인 은혜를 주시지만 특별히 주를 믿는 다윗의 자손들과 아하스에게 보여주신 임마누엘의 징조가 항상 있어 위로와 소망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사미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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