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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열왕기상19:1-10 요절: 열왕기상19:4     

 

 

(시사미래신문) 한산도 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왜구의 간계와 조정의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고 옥중의 죄수가 되었을 때 그는 자결함으로 자기의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던질 가치없는 목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백의종군하였다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13척의 배와 그의 곁을 지켰던 몇몇 장수들이었습니다.

 

그는 13척의 배로 명량해협에서 왜군 300여척을 격파하였습니다.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에서 그는 왼쪽 가슴에 탄환을 맞아 한 목숨을 나라를 구하는데 장렬히 내 던졌습니다. 이순신, 우리는 이런 사람을 영웅이라고 합니다.

 

목숨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그 귀한 목숨을 무엇을 위해 던지느냐가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수많은 영혼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헌신하여 드렸습니다. 물속에 빠져 들어가는 어린 생명을 구하다가 자기 목숨을 잃어 버리는 무명의 사람도 있습니다.

 

사회정의와 공익을 추구한 자기 삶이 송두리째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자기파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한 안타까운 죽음을 우리는 지난주 목도하였습니다.

 

내 체면이냐 목숨이냐, 내 성취냐 생명이냐? 우리에게 무엇이 귀하고 소중합니까? 수로보니게 여인은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자기 딸을 구하기 위해 개 취급 당하는 수모까지 참으며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모멸과 멸시도 생명보다 귀하지 못합니다.

 

생명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생명을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창조해 주셨고, 예수님은 나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제단 앞에 아낌없이 피한방울 남김없이 다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목숨을 내 마음대로 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신앙의 영웅이요 불의 종이었던 엘리야 선지자도 죽고 싶어 합니다. 서슬 퍼런 권세를 휘두르던 왕비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광야로 도망하여 홀로 있을 때 그도 이제 족하오니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요청합니다.

 

엘리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 아니었다면 그도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너무 힘들고 지쳐 죽고 싶었지만 그래도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한 가지가 달랐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도 코로나 펜데믹 상태가 생각 이상으로 길어지고 있으므로 그 공포 앞에 떨며 힘들고 지쳐 마치 광야에 홀로 쓰러진 엘리야와 같을 심정일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성의 시간이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1.드러난 민낯

재난이나 팬데믹 같은 현상은 정돈된 무대 위 커튼을 젖혀 일시에 무대 뒤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는 창문과 같습니다. 코로나19가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은 시민사회 없는 국가주의의 폭력성이 드러났습니다. 시장에만 의존하던 미국은 공익성 부재가 여실히 드러나면서 최근엔 인종 갈등까지 터졌습니다. 일본은 애국적 비밀주의, 매뉴얼 사회의 경직성을 보여줬습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한국에서는 신천지 등 감옥처럼 닫힌 조직들이 드러났고, 폐쇄된 공동체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공익우선주의, 미국의 시장주의를 잘 조합하고 균형을 이루어 우리는 공익과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아래 슬기롭게 펜데믹 상황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동체와 개인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와 개인의 조화와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키워 왔습니다. 구역 모임을 하면서, 성가대를 하면서, 교회 학교에서, 각 봉사 부서에서 친밀한 교재를 하며 이렇게 신앙의 공동체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우리는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으로 돌아갔습니다. 개인이 머무는 장소가 그 어디이든 바로 그곳이 예배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그럴 때 과연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처음 몇 달간은 실시간 동영상 예배를 잘 드렸는데 석달이 지나자 예배의 자세도 무너지고 그 숫자도 줄어들고 있으며, 온라인 헌금도 지속적이지 않습니다. 개인 신앙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있는지 그 민낯을 보게 됩니다.

 

교회는 그동안 교회 건물로, 프로그램으로 많은 교인을 모으는데 집중해 왔습니다. 건물만 잘 건축하면, 프로그램만 좋으면 성도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건물이 전도하고 프로그램이 정착시켰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는 모여든 성도들을 세상 속으로 파송하게 하였습니다.

 

이세벨이 엘리야를 광야로 몰아넣었듯이 코로나는 우리를 광야로 달려가게 했습니다. 그 홀로선 광야에서 과연 우리 크리스천들은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코로나 19앞에 모으기에 열을 올렸던 한국 교회의 부실한 신앙의 민낯이 드러났습니다.

 

선교사는 아무도 없는 광야 같은 곳으로 파송을 받아 갑니다. 거기엔 예배드릴 장소도 없고, 나를 반겨주는 이들도 없으며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릅니다. 외롭고 쓸쓸합니다. 그가 있는 곳이 교회요 그가 머무는 곳이 예배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안 드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고, 헌신을 하지 않아도 누가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 홀로선 광야 같은 선교현장에서 선교사의 영성이 드러납니다.

 

잘 훈련된 선교사는 그 고독 속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그가 있는 곳에서 예배하며, 함께 예배할 사람을 만들어 교회를 세워갑니다. 모세도 미디안 광야에서 살아남았고, 세례요한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광야에서 다듬어 지고 훈련되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우뚝 섰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선교사로 살아남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으는 것에 열을 올리던 데서 세상 속으로 파송하는 교회로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때가 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한분 한분은 이제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를 강한 영성을 지닌 사역자로 키워야 합니다. 코로나 19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사명을 던져 주고 있는 것입니다.

 

건물과 프로그램, 유명 배우 같은 목회자에게 집중하던 관행을 내려놓고 나 스스로 세상 속에서 선교사가 되어서 신앙을 사수하며, 거룩한 예배자로 우뚝 설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를 만들어 내지 못하는 교회는 도태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철저히 개인 신앙으로 살아남는 선교사가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2.나만 홀로 있나이다

2018년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가구의 약 30%가 1인 가구입니다. 2015년 조사에서는 연령별로 20대 95만호, 30대 95만호, 40대 85만호, 50대 88만호, 60대 158만호가 1인 가구였습니다. ‘혼자’의 문제는 청년만의 문제가 아닌 모든 세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혼자의 문제가 다가 왔는데. 그런데 혼자서 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엘리야도 혼자의 카테고리에 갇혀 깊은 절망을 경험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하나님께 자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 죽고 싶어 하는지를 말하는 이유였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혼자라고 생각할 때 깊은 고독과 극도의 우울증을 겪고 피해 의식에 사로잡힙니다. “고생해도 나같이 고생할까? 왜 나만 헌신해야 되나? 왜 나만 이런 아픔을 당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한번은 모두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상당히 억울하고, 외롭고 불행함을 느낍니다. 엘리야 같은 신앙의 영웅도 그래서 로뎀나무 아래서 홀로 아파하고 좌절하고 죽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엘리야 말고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사이에 오랫동안 ‘슬픔의 나무’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다 보면 한 나무를 지나게 되는데, 그 나무가 바로 슬픔의 나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겪었던 슬픔을 나무에 걸어둘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걸어둔 슬픔 중에서 가벼워 보이는 걸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슬픔을 나무에 걸어둔 뒤에는 신중하게 다른 이가 걸어둔 슬픔을 살피기 시작합니다. 그런 끝에 마침내 선택하는데, 대부분은 같은 선택을 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처음 걸어두었던 바로 그 슬픔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나만큼 슬픔을 겪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지만, 막상 다른 사람의 슬픔을 살펴보면 그래도 내가 겪은 슬픔이 가장 감내할 만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힘들고 슬픈 일이 많아도 내게 주신 삶이 가장 고맙다는 걸 깨닫는 자리, 바로 그곳이 천국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십자가는 슬픔의 나무일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를 만나기전 우리 모두는 나만큼 슬픈 사람을 없을 거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만나고 나면 그 앞에 우리는 할 말 없는 자가 됩니다. 오히려 나의 슬픔은 은혜의 샘터가 됩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혼자”라는 숙제를 던졌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혼자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광야에 홀로선 엘리야에게 찾아와 그를 위로하고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3.사명을 회복하라

죽여 달라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사명을 줍니다. ‘사명의 회복’ 이것이 회복의 비결입니다. 엘리야에게 주신 사명은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우고,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 부어 선지자가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펜데믹시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혼자의 자리에서 무너지지 말고, 그곳이 어디든 교회를 세워나가는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혼자서 영상으로 드리는 예배 속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은혜 넘치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인을 우리는 세워 나가야 하고, 우리 각자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조화와 균형입니다. 공동체 신앙과 개인 신앙의 균형입니다. 우리 민족의 독특한 기질이 있습니다. 스포츠도 혼자 하는 것은 금메달이 많은데, 여럿이 하는 것은 금메달이 적게 나옵니다. ‘나’는 잘하는데 ‘함께’하지 못합니다.

 

선교지에 나가보면 이런 민족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 한국인 선교사들은 세계 어떤 나라의 선교사보다 탁월합니다. 서구선교사가 하지 못하는 일을 우리 한국 선교사들은 다 해 냅니다.

 

북치고 장구치구 모든 것을 혼자 다 해 냅니다. 한 가지를 잘 못하는데 그것이 바로 협력사역입니다. 그런데 서구선교사들의 탁월한 점은 ‘협력 사역’입니다.

 

개인신앙을 강조한다고 공동체의 신앙을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한 지역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공동체신앙과 개인신앙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공동체로 묶여진 그리스도의 몸이며 동시에 세상에 파송 받은 예수의 제자 즉, 삶의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펜데믹시대 홀로선 광야에서 우리는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깊이 고민하며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축원합니다.

 

시흥광명교회  김승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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