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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마지막 종말신앙(벧전4:7-11)

종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종말신아을 가져야 합니다.
-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 뜨렵게 서로 사랑해야
- 선한청지기처럼 봉사해야

 

  우리는 흔히 ‘시작이 반이다’라고 말합니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작이 좋아도 마지막이 좋지 않으면 그 일은 실패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분명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은 그 끝이 좋아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종말론적입니다. 세상의 종말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매우 중요한 핵심 메시지로서 개인적 그리고 역사적 종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적 의식과 신앙이 필요한데 구체적으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Ⅰ. 그리스도인의 종말의식(7절 상)

 

 애플 컴퓨터의 CEO인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2011년에 고인이 되었는데 그는 죽기 전에 미국 서부의 명문대학인 스탠포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그 내용인즉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If you live each day as it was your last, someday you will most certainly be right.)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나는 50살이 되기까지 33년 동안을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에 ‘아니오!’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늘 마지막을 사는 삶은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듭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분명한 종말의식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매일 마지막을 산다는 생각이 그들의 삶에 긴장감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였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서로 만나 인사할 때도 “마라나타”라고 인사했다고 합니다. 마라나타의 뜻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인사하면서도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았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다.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쳐도, 밤하늘의 별만 봐도 “주님 이제 오십니까?”라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종말의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메시지도 교회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교회가 영적인 능력을 잃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무기력해졌고, 영원을 바라보는 눈이 흐려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치 지옥 불에 떨어질 불신자처럼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처와 같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은 천국뿐입니다. 이 땅은 장망성입니다. 장래 망할 성이지요.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께 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라고 말을 꺼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오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에게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세 가지 종말신앙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Ⅱ.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세 가지 종말신앙(7하-11)

 

1.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십시요(7)

 

 본문 7절의 말씀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정신을 차리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σωφρονησατε(소프로네사테)’라고 합니다. 이는 ‘올바른 마음’, ‘침착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왜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 때에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했을까요? 아마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여러 가지 일들과 사건, 사고, 천재지변과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고, 또 미혹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때가 될수록 정말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 바로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베드로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깨어 있지 못하고 그만 잠들어버렸습니다. 주님은 잠든 베드로를 깨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그 후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주님을 잡으러 왔을 때, 잠에서 깬 베드로는 그냥 자기감정대로 칼을 휘두르다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붙잡혀가자, 그 결말을 보려고 멀찍이 뒤따라가서는 숯불을 피워놓은 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한 계집종이 다가와서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마26:69)라고 하자,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한 번만이 아니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자다가 그는 비참한 자리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방향과 어긋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자신생각, 자기감정대로 행하다가 비참한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우리 주님은 마지막에도 늘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기도로 하늘 아버지와 교제했고, 뜻을 알고 순종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내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이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기도를 하면 할수록, 십자가의 죽음이 하늘 아버지의 뜻인 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결단했습니다.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당당하게’ 조금도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기도해야 합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립니까? 왜 그렇게 유혹에 약하고, 잘 속습니까?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우리들은 기도를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기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뜨겁게 서로 사랑하십시오(8-9)

 

  본문 8-9절에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여기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몇 몇 조사기관의 통계에 대부분의 사람이 죽기 전에 제일 많이 후회하는 것, 1위가 바로 ‘더 많이 사랑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직전에 가서야 가족이나 친구들,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 종말의 때에는 그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뜨겁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εκτενη(에크테네)’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힘껏 노력하는’, 또는 ‘전심전력하는’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운동선수가 골인 점을 향해 뛰어가서 거의 다다르게 되었을 때에 골인 지점에 먼저 닿으려고 머리를 내밀거나 가슴을 내밉니다. 0.1초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에크테네’입니다. 내 삶이 거기에 달려있는 것처럼, 그것이 내 인생에 전부인 것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뜨거운 사랑이 메말라가는 세상, 종말의 시대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가지 실제적인 일을 이루어 내게 됩니다.

하나는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우선,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용서’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용서를 만들어낸다” 사랑하면 용서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허다한 죄를 덮는 용서’는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엡1:7) 미움과 시기를 걷어내고 사랑으로 덮어주십시오,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실제로 만들어 내는 두 번째 행동은 ‘대접하는 것’입니다. 고대 기록에 의하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의 특징 중의 하나는 항상 자신들의 집 문을 열어 놓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지나가는 나그네와 순회 전도자에게, 그리고 이웃에 사는 고아와 과부들을 향해 문을 열어놓고 그들을 손 대접하기를 즐겨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라합이 지나가는 나그네(정탐꾼)를 손 대접하다가 주의 사자를 대접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예수님이 가난한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 집을 찾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손 대접하는 것을 힘썼다는 것입니다.

 

3. 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십시오(10-11)

 

  본문 10-11절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여기에 보면, 은사를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찬양을 잘하고, 어떤 분은 가르치기를 잘하고, 어떤 분은 음식을 잘 만듭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서로 다른 은사를 주셨을까요? 그것은 이 은사를 가지고 서로 봉사하고 섬기라는 것입니다. 은사는 비교하거나 자기자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들을 섬기고,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합니다. 마치 청지기가 주인의 것으로, 주인이 기뻐하는 일에 사용하듯이 우리는 ‘내 것을 가지고 내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청지기처럼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 사도는 ‘누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또 누가 봉사하려거든 하나님이 공급하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가르칩니다. 왜 이렇게 봉사해야 할까요? 그것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자신이 드러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도록 우리는 말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1994년 ‘안도현’이라는 시인이 발표한 시집, 《외롭고 높고 쓸쓸한》에 보면, 총 3행에 불과한 짧은 시가 하나 나옵니다. 바로 ‘너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짧은 글이 이 시의 전부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이렇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길거리 모퉁이에 쌓여있는 연탄재. 술 취한 사람이 ‘왜 거기 있느냐?’고 시비 걸며 걷어차는 연탄재. 화난 사람이 ‘제기랄!’하고 소리치며 화풀이로 걷어차는 연탄재. 장난기 발동한 동네 꼬마 녀석들이 공처럼 걷어차는 연탄재. 그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 그래도 연탄재는 다른 사람의 차가운 방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일이라도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도움이 된 적이 있냐?, 단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을 섬겨본 적이 있느냐?” 정말 가슴 뜨끔한 질문입니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더 기도하고, 사람들과는 더 사랑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는 더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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