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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책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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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호모 헐버트 박사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 중 하나”
“3·1운동은 애국심의 본보기”
한글, 거북선, 기록문화 등 한국인의 우수성 높이 평가
‘헤이그 특사’로 감시 받으면서 美에 일제 만행 알리려 분투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헐버트(1863∼1949) 박사다. 헐버트 박사는 23세 때 조선을 만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 63년을 한민족과 영욕을 같이한 외국인 독립운동가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49년 7월 29일, 미국에 살던 86세 노인이 광복절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빈 초청을 받고 내한했다. 한 기자가 방한 소감을 묻자 이 노인은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위와 같이 대답했다.

 

일제의 박해로 한국을 떠난 지 40여 년. 한국 땅을 다시 밟는다는 감격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청춘의 23살 나이에 조선 땅을 처음 밟아 생을 마감할 때까지 63년 동안 한민족과 영욕을 함께한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박사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내한 일주일 만인 8월 5일 서거했다. 고인은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된 후 소망대로 서울 마포의 한강변에 있는 양화진에 안장됐다.

 

박사는 이듬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받은 데 이어 2013년 7월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고, 이듬해와 그 이듬해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과 제1회 서울아리랑상이 차례로 추서됐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역사의 양심 헐버트!  그가 한국 근현대사에 남긴 발자취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크다.

 

신간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헐버트 박사의 삶과 한국사랑을 총체적으로 정리한 일대기다. 교육자이자 한글학자요 역사학자였으며, 나아가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의 길까지 두루 걸었던 그의 열정적 흔적을 감명 깊게 더듬어볼 수 있다.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미국 동북부의 버몬트주에서 대학 총장과 목사였던 아버지와 다트머스대학 설립자의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헐버트는 '원칙이 승리보다 중요하다'는 가훈 속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조선 최초의 근대식 관립학교인 '육영공원'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이 땅을 찾았다.

 

내한하자마자 그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매료된다. 한민족 문화의 진수를 한국인보다 짙게 음미하며 한민족의 앞날에 희망의 꿈을 품었다. 특히 한글 사랑은 놀랄 만큼 뜨거웠다.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며 한글 전용을 최초로 주창한 이가 바로 헐버트 박사였다. 최초의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와 최초의 종합역사서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역시 그에 의해 출간됐다.

 

가훈의 영향이 컸을까. 그의 일생은 저항과 도전의 역사이기도 했다.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모양과 색깔, 그리고 향기를 견지해나갔다. 내한 초기에는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는 청나라의 횡포에, 한글 전용을 주창하면서는 한자만을 고집하던 사대부의 보수성에, 조선의 자주독립을 역설할 때는 러시아와 일본의 침탈 야욕에 맞섰다.

 

이뿐 아니었다. 고국인 미국에 도움을 청할 때는 미국의 친일적 작태를 비판했고, 일본의 한국 식민화를 국제사회에 고발할 때도 미국 지성사회의 한국 몰이해에 저항했다.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한민족이 세계 속에 우뚝 서리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직후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던 인물이 바로 헐버트였고, 을사늑약을 저지코자 1905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방문한 고종 황제의 대미 특사 또한 그였다. 이듬해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고종 황제의 특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헐버트의 진하고 뜨거운 한국사랑은 이 땅의 청년들에게 큰 울림을 낳았다. 교육 열정은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에서 주시경, 이승만 등에게 학문적 욕구를 자극했고, 대일항쟁의 열정은 멀리 연해주에 있던 안중근 의사의 귀에까지 전달됐다. 이와 관련, 안 의사는 거사 후인 1909년 뤼순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간곡히 당부했다. 헐버트는 3.1운동에 대해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가치"라며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헐버트의 한국 사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는 한민족의 한과 희망이 함께 서린 전통민요 '아리랑'이다. 구전 아리랑에 최초로 서양 음계를 붙여 아리랑 악보를 선보이고 아리랑 가사도 채록했던 주인공이 바로 헐버트였던 것.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이 제1회 서울아리랑상을 추서한 배경이기도 하다.

 

이번 책은 헐버트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조명해 그의 역사적 공헌을 되살려냈을 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을 찾아 그의 흔적을 추적하며 숨겨진 역사를 발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헐버트 박사가 1889년 조선 말글의 우수성을 뉴욕트리뷴지에 기고하며 한글의 자모를 최초로 소개했다는 사실과 1905년 을사늑약 저지를 위해 고종 황제와 전보를 주고받았다는 기사(뉴욕타임스) 등이 그 사례다.

 

 

저자는 "그의 학문적 열정과 지성의 기품, 불의에 항거하는 행동하는 양심, 평등박애를 실천한 인간애에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다"며 "헐버트야말로 조선의 척박한 현실을 마다 않고 한민족에 동화한 진정한 한민족의 벗이자, 바른 삶의 좌표를 행동으로 제시한 가치관적 영웅이었다"고 각별한 존경심을 표시했다.

 

대학 시절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고 헐버트의 한국 사랑과 가치관적 삶에 매료됐다는 저자는 이번 책에 앞서 '파란눈의 한국혼 헐버트'(2010년),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2016년) 등의 관련서를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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