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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구 박사 칼럼> 광복절과 건국절 그리고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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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

-“공산주의자들에게 굴복하지 마라”(Don’t s-urrender to Communists)

(시사미래신문)


  지난 정부에서 광복절의 의미를 되살린다고 상해 임시정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세운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가리워 진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치 대한민국이 100년 전에 탄생한 듯 회자 되고 역사기록을 바꾸려는 듯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가 아무리 크다 해도, 임시와 정시를 구별해야 할 듯하다. 또 하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아야 할 국가인 듯이 폄하 하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자유대한민국과 입장을 달리하는 식자층이나 역사가들도 그리 몰고 가는 듯한 인상이 짖다.

 

 필자는 이승만 박사의 거처였던 <이화장>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고,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지역인 하와이를 세 번이나 가서, 하와이 대학교 동서센터에서 독립운동의 희귀한 자료를 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 박사가 공부했던 프린스턴 대학교를 10여 차례 방문하고 그의 족적을 연구하기도 했다.

필자는 1993년 모스크바에서 <한국학 세계대회>에 참석했었다. 주제는 「한국의 현대화」(Modernization of Korea)였다. 그 자리에는 한국의 여러 대학 대표들이 참가해서 의미 있는 발표를 했지만, 필자는 기조연설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두 말 할 필요 없이 <기독교 신앙> 곧 <복음>이 한국 현대화의 근거라고 발표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근대화는 기독교 없이는 설명할 수 없었다. 

 

 1948. 8. 15. 뉴욕 타임즈 조간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톱뉴스가 나왔다. (The New York Times, 1948. 8. 15. New York. Sunday) 즉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의해서 주권국가가 선포되었다. 국가 이름은 The Republic of Korea로, 한국말로는 대한민국(Tai Han Min Kook)이라 하였다.” 했고, 대한민국은 자유(Freedom)와 민주주의(Democracy)를 표방한다고 썼다. 특파원 리챠드 J. H. 존스톤은 헤드라인으로 「Korea Set Up Republic」이라 했고, 부재로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3년 만에 미 군정에 종지부를 찍고 남한 단독으로 주권국가를 선포하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고, 우남 이승만 박사는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國父)였다. 유엔(U.N)은 1948년 12월 12일에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 정부로 결의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부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있던 그 날, 김구 선생은 말하기를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결심과 용기를 가지고 강력한 통일 운동을 추진해야 되겠다」(김현태 p.24) 고 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위대한 독립 운동가 이기는 해도,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남북합작, 민족통일을 염원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용공주의자들이나 비판자들은 이승만을 남북분단의 책임자로 몰아붙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이에 필자는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에 대해서 몇 가지 첨언(添言)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우남 이승만 박사는 청빈하고 깨끗한 대통령이었다. 1980년대 나는 이승만 박사의 사저였던 <이화장>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때 나는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고 양자 이인수 박사 내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승만 박사의 유품들을 돌아보았다.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는 경무대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검소했으면 양말을 기워 신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나라의 독립과 건국을 위해서 평생을 바쳤으나 그가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둘째로 우남 이승만 박사는 독립운동가로서의 일생은 동서양 학문을 통달하고 어학의 천재요, 외교의 귀재로서 뿐만 아니라 문필가로서 우리 민족의 등불이었다. 그의 <독립정신><일본 내막기><일민주의> 등의 저서나 그의 국제무대의 연설 등은 국내외의 모든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지도자였음이 입증되었다.

 

셋째 우남 이승만 박사는 신앙의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을 <기독교 입국>으로 세우려 했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가서 1904년 4월 23일 워싱턴 D. C. 의 커버넌트 장로교회 루이스 헴린(Rev. Lewis Hamlin)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커버넌트 교회는 스코틀랜드 정통 장로교회였다. 이승만은 워싱턴 대학교에서 공부할 때 이 교회에서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철저한 신앙 곧 칼빈주의 신앙을 배웠을 것이다. 특히 프린스턴 대학교에 박사학위를 공부할 즈음에 이승만은 일 년 동안 신학 공부에 주력했다. 이승만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1년간 공부하는 동안, 당대의 프린스턴 신학의 대표적 학자인 비 비 월필드(B. B. Warfield)와 겔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J. 그린(J. Greene), 찰스 어드만(Charles Eerdman) 박사 아래서 공부했다.

 

 세상의 지도자들 모두가 완전한 자는 없다. 이승만도 인간적 약점이 있다. 하지만 우남 이승만 박사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는 <올리버 박사>의 말은 옳다고 본다. 나는 미국의 많은 대통령의 기념관을 직접 가서 보았다. 그 대통령이 모두 잘 한 것은 없지만, 장점만 높이 세워 그의 사상과 삶을 기념하는 것을 보았다. 역시 미국은 미국이었다. 건국 75년 동안 건국 대통령 이승만의 기념관 하나 못 세우는 우리들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다. 이제 이승만 기념관이 세워지려는 움직임은 고무적이다. 

 

1954년 8월 13일 U. S. News & World Report에서, 우남 이승만 박사와 장문의 특별 인터뷰에서 이 박사의 핵심 메시지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굴복하지 마라”(Don’t s-urrender to Communists)였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의 공적은 이 땅에 공산주의를 몰아내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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