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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원로배우 신영균(91세)이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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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 재산을 영화발전에 그리고 모교인 서울대에 환원
- 성경책 50년 손때 묻은 것 하나면 족하다고

 

원로배우 신영균(91)이 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혀 화제다.

 

1960~70년대 대스타로 활약을 펼쳤던 그는 앞서 2010년 명보극장(명보아트홀)과 제주 신영영화박물관 등 500억 원 규모의 재산을 한국 영화 발전에 써달라며 내놓은 바 있다. 모교인 서울대에도 시가 100억 원 상당의 대지를 발전기금으로 기부했다.

 

그는 배우·사업가·정치가. 1928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1955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치과의원을 개업중이던 1960년의 연극공연 때 영화감독 조긍하에게 발탁되어 영화 〈과부〉로 데뷔했다. 그뒤 〈마부〉(1961)·〈연산군〉(1962)·〈열녀문〉(1963)·〈빨간 마후라〉(1964) 등에 출연해 한국영화의 전성시대인 1960년대 초반 대표적인 남자배우로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는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김진규·최무룡·신성일과 함께 숱한 한국영화에 출연해 주로 여자배우에 의해 주도되어온 영화계의 흐름을 바꾸어놓았다. 사극과 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소위 문화물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과시한 그는 강인한 성격을 가진 다혈질의 역할을 연기해 독특한 개성을 발휘했다.

 

이러한 대중 스타로서의 인기는 1960년대 후반까지 이어져 〈갯마을〉(1965)·〈남과 북〉(1965)·〈미워도 다시 한번〉(1968)과 같은 흥행대작들에 출연했다. 또한 대종상 남우주연상 3회, 아시아 영화제 남우주연상 2회 수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 이후에는 사실상 연기자의 길에서 은퇴해 명보극장을 경영하는 등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1960~70년대에는 내 영화를 맘껏 틀 극장이 너무나 갖고 싶었지만 이제는 욕심이 없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지고 갈 것은 40~50년 손때 묻은 이 성경책 하나"라고 말했다.

 

신영균의 기부를 토대로 지난 2011년에는 신영균영화예술재단이 출범한 바, 이 재단은 수익금으로 영화인 자녀 장학금을 지급하고, 단편영화 제작 지원을 하는 것은 물론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을 통해 연극·영화계 인사들의 공로나 선행을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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