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 칼럼>안동 댐, 안동 댐

  • 등록 2025.07.23 10: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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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미래신문)

 

 요즘은 거의 모든 언론 매체가 <안동 댐>에 대한 방송이 많다. 미국에서도 안동 댐이라는 말이 오르내리고 있을 정도다. 그리고 강남대로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청년들이 <안동 댐, 안동 댐>을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안동 댐>은 실제로는 <안동호>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러면 왜 갑자기 안동 댐이 뉴스의 초점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소문을 듣자 하니 안동에서 큰 인물이 나왔기 때문이란다. 안동지역은 세월을 뛰어넘어 마치 이조 시대에 와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안동 댐 근방에는 이조 시대의 문화유산이 너무나도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안동 댐과 연결된 <예안>에 대한 이야기가 모든 언론 매체에 도배가 되고 있다.

 

안동 지역은 선비의 고장이요, 유학의 전통과 문화가 숨 쉬는 곳이다. 안동은 유림의 전통으로 케케묵은 보수주의 자들이 사는 지역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안동 지역은 독립운동의 근거지요, 독립 투사들이 가장 많이 난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3·1운동 당시 예안의 장날에 시작된 만세 운동은, 경북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지역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예안은 <예안 이씨> 종가와 <예안 김씨> 종가가 있고, <판서 댁> <처사 댁> <진사 댁> <향교> 등 많은 역사 문화 자료가 있다. 무엇보다 도산 서원을 세우신 <퇴계 이황> 선생의 유적들은 토계리에 있다.

 

그러므로 안동은 정신문화의 수도이자, 퇴계의 성리학을 이어받은 곳으로 안동 그 자체가 문화유산의 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듯하다.

 

사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안동 예안 서부동 88번지>이다. 오늘의 지번은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라고 한다. 서부리는 예안의 중심부로 <선성 현>을 비롯해, 주요한 기관이 있는 소읍이었다. 필자의 집은 서부 거리 중에서도 장터 입구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릴 적 기억으로는 예안에 장날이 들어서면 주변 마을 사람들이 온갖 먹거리를 가지고 장에 나왔는데 소전거리가 유명했다.

예부터 안동에는 소를 키우는 사람이 많았고, 그래서인지 장날이 되면 소를 사고파는 것이 <예안의 축제>로 자리 잡았다. 우리 집은 우시장 입구에 기억 자로 된 초가집으로, 앞마당과 뒷마당이 있었다. 필자가 일곱 살 때, 포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나는 그곳에서 초,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래도 유치부 시절 예안교회에 출석한 일이 있었던지라, 예안교회에서는 필자를 그 교회 출신이라고 담임 목사님은 자료를 보내주시고 지금까지도 서로 소통하고 있다.

 

1970년대 초 정부는, 수자원 개발을 위해 예안 마을을 수몰지구로 결정하여 나의 고향은 그만 사라지고 말았다. 포항으로 이사는 갔지만, 나는 우리가 살던 집이며, 전답이 있는 고향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고향을 떠난 필자는 1972년에 암스텔담으로 유학을 떠났다. 5년 만에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오니, 예안은 온데간데없고 그곳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안동 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실향민이 되었고, 어릴 적의 모든 추억은 저 호수 안에 잠겨 있었다. 1982년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을 때 안동 댐은 바닥을 드러냈고, 거북등처럼 갈라져서 그 옛날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나무, 맷돌, 깨어진 장독, 무너진 담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하자, 고향이 너무도 그리웠던 필자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필자의 외조부는 임(任)자, 시(時)자, 호(鎬) 자를 쓰는 어른으로, 온혜리에서 평생을 <서당 훈장>으로 계셨고, 두 차례 걸쳐 <도산 서원의 원장>으로 계셨던 분이다. 외조부는 퇴계학파의 선비였다. 물론 안동에는 도산 서원을 대표로 해서 여러 서원과 향교가 많이 있으나, 지금 안동 댐이 건설되자 본래의 예안은 수몰되고 산 중턱에 새로운 마을이 조성된 곳이 오늘의 예안이다. 새롭게 예안이 조성될 때, 즉 수몰 직전에 있을 때, 중요 문화재들은 산 중턱으로 이전했고, 어느 예술가가 길과 벽에 재미있는 그림을 그리고 예술의 끼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예끼마을>이라고 했다. 그리고 안동 댐에는 1km 이상의 수상 테크가 있어, 마치 호수 위를 걸어가는 기분이 든다.

 

 요즘 사람들이 안동에서 난 인물(?) 때문에 관광객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안동 하면, <도산 서원> <하회 마을>이 떠오른다. 하회 마을은 일찍이 영국 여왕이 직접 찾아와서 생일상을 받는 등 전통과 예를 사랑하는 고장은 맞다. 그런데 우리나라 유학 특히 성리학의 대가인, <퇴계 이황>이 난 곳이라, 너무나도 고루하고 유교 사상에 젖어 있었는데,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곳에 뿌려졌고, 그곳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특히 한국 교회의 거목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일본의 황민화정책에 맞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반대해, 네 번이나 투옥되었으나 꼿꼿하게 신앙의 정조를 지킨 봉경 이원영 목사님이 있다.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나 나라 사랑, 교회 사랑의 선비 목사가 되었다. 그가 세운 안동성경학교 학생들이 후일 한국 교회의 큰 인물들이 되었다.

 

필자도 안동 예안 서부동 88번지에 태어났고, 외조부가 <도산 서원 원장>을 지냈으나,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되어 교수와 총장으로 지금 이 순간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섬기게 된 것은 은혜 위의 은혜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안동 댐!> <안동 댐!>

강은민 기자 rkddmsals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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