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날과 메뚜기 재앙(욜1:1-15)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들, ‘코로나19’ 라는 전염병으로 마스크를 끼고 사회적 거리를 두고 조심하면서 비 대면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고 오후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교회에서 식사와 기타 모임을 금지하고, 국가적으로는 부동산 집값은 배로 오르고, 공수처를 만들고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하려는 임기가 보장된 검찰총장을 징계하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엘선지자가 활동하는 시대에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인 메뚜기 재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엘을 통하여 이런 재앙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하고 살아야 할 것인가를 기억하며 자녀는 자녀에게 그리고 후손에게 말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가슴에 품고 순종하며 전할 때에 큰 은혜와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Ⅰ. 요엘 선지자 시대 경험하지 못한 재앙과 그 배경은?(1-4)
요엘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건이 ‘메뚜기 재앙’입니다. 이 재앙에 대하여 증거한 선지자 ‘요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요엘 1장 1절에 소개된 “브두엘의 아들 요엘”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요엘이라는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는 것과 요엘의 아버지 브두엘의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설득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인 것으로 보아, 요엘의 가정이 여호와를 섬기는 경건한 가정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염병이 있었던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14c 중반(1346-1352) 흑사병(페스트)가 발병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유럽으로 확산되어 교통이 발달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접촉이 그렇게 많지 않은 가운데서도 몇 년 만에 무려 75,00만에서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류사상 최악의 범유행이었습니다. 2010년에서 2011년 남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DNA분석 결과 페스트의 병원균이 간혹 쥐와 같은 야생설치류를 감염시켜 그 피를 빠는 벼룩을 통하여 인간에게 감염시키고 감염된 인간의 기침이나 비말을 공기 중에 분출할 때 감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코로나19도 우한에 있는 박쥐를 통해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메뚜기의 재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성경 속 메뚜기 재앙 스토리는 하나님께 모세를 통해 애굽에게 내리신 열 가지 재앙 중 8번째 재앙인 메뚜기 재앙입니다.
1654년 대만에 메뚜기 재앙으로 8000명이 굶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2004년 아프리카 세네갈에 수십억마리 메뚜기가 몰려들어 1년 농사 생산량의 사분지일을 먹어 치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에 의하면 미국인 중국 선교사의 딸로서 펄벅(1892-1967)은 그의 소설 대지(The good earth)에서 중국의 농촌을 중심 배경으로 써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어느 날 농촌에 메뚜기 떼로 인하여 결국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게 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본문의 메뚜기 재앙이 있었던 그 시대에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유대의 8대왕 요아스의 재위기간(BC835-796) 때에 사역한 선지자로서 4대왕인 여호사밧이 북왕 아합과 사돈관계를 맺고 아들5대 왕이 여호람(요람)과 결혼을 여인이 아달랴(북이스라엘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입니다. 여호람이 죽고 아들인 아하시야가 즉위 1년에 북쪽 왕에게 조문을 갔다 예후에게 죽습니다. 화가 난 아달랴가 왕이 될 만한 왕손과 대신들을 자 죽이고 드디어 7대 여성 왕이 됩니다. 그런데 아달랴는 북쪽 바알종교의 부활을 꿈꾸고 다윗의 언약을 끊으려는 음모를 하였으며 또한 많은 사람을 정치적 야망으로 숙청하고 죽이는 일이 있었고 악한 정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개혁을 외쳤고 참지 못하던 그 당시 대제사장 여호야다(아하시야의 동생 여호시바의 남편)은 그 아들 요아스를 숨겨 키웠고 대 제사장은 아달랴를 저격합니다. 그리고 요아스를 8세에 왕으로 세우게 되었고 섭정한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선한정치를 펼칩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악한 정치를 하던 때에 요엘은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지자 요엘은 현재 남 유다가 당하고 있는 메뚜기 재앙의 의미를 백성들에게 선포하며, 동시에 그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미래 이스라엘에 쳐들어 올 수 있는 많은 적군들로 인한 큰 재앙을 이중 예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메뚜기 재앙을 이스라엘 자손 대대로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욜 1:3) 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고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고하고 그 자녀는 후시대에 고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메뚜기 사건을 이스라엘 후손들이 잊지 않도록 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 재앙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징계하고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재앙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메뚜기 재앙 이야기를 통해서 죄를 지었을 때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 그들의 삶에 찾아올 수 있는지 경고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우상을 섬기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후대에도 메뚜기 재앙이 주는 의미를 잊지 말게 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오늘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버리고 불신의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큰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회복과 구원의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4절을 보면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 이렇게 네 가지 다른 곤충의 이름이 쓰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히브리어로 보면 사실 이 네 가지 모두 메뚜기 종류의 곤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메뚜기라고 하지 않고 네 가지 다른 이름을 다 쓴 것일까요? 그것은 메뚜기 재앙이 시간 간격을 두고 점진적으로 임하였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메뚜기 재앙은 한 차례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거듭 반복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죄와 함께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한 번만 경고하시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징계와 경고를 하십니다.
Ⅱ. 대 재앙으로 인하여 나타난 현상은 무엇입니까?(7-16)
이런 전대미문의 메뚜기 재앙인 심판으로 나타날 현상은 지금도 많은 공감을 갖게 합니다.
첫째, 경제적으로 피폐한 시련이었습니다(7-8).
7절에 메뚜기로 인하여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를 갉아 먹으므로 맑갛게 벗겨지고 가지가 하얗게 되었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는 생활자체가 절체절명의 상태임을 말하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9-11).
요엘 1장 9절입니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을 드는 제사장은 슬퍼하도다” 소제와 전제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출애굽기 29장을 보게 되면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그래서 이것을 항상 드린다고 해서 상(常)번제라고 합니다. 제물인 양(羊)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고운 밀가루로 소제를 드리고 포도주를 부어 전제를 드립니다. 상번제를 드리면 소제와 전제가 항상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소제를 드리려고 하는데 밀가루가 없고, 전제를 드리려고 하는데 포도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하는 현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지옥에는 설교를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습니다. 지옥에는 설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찬송을 듣고자 해도 성가대가 없습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음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지옥이 아니라 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하는 나라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으니 행복한 사람입니다.
셋째, 인간의 희락이 말라버렸습니다(12,16).
요엘 1장 12절 후반부입니다. “이러므로 인간의 희락이 말랐도다.” 가정에도 필요한 것이 희락입니다. 가정에 가면 “깔깔깔”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해야 합니다. 남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바가지부터 긁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도 희락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와도 희락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성도들은 모두 윗 이를 보이고 인사해야 정상입니다. 희락이 없으면 다툼과 싸움, 분쟁만이 있을 뿐입니다. 지옥은 영원히 희락이 없는 곳입니다. 예배와 희락이 사라지면 그 곳은 바로 지옥입니다.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에 대한 바벨론의 3차 침공 후 멸망의 상황을 동일하게 묘사하였습니다.
요엘서 1장은 메뚜기 재앙을 군대 용어로 설명한 것이고 요엘서 2장은 군대의 침략을 메뚜기 용어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자가 증거 하는 메뚜기 재앙의 핵심은 그것이 단순한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엘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지는 메뚜기 재앙이 경종(alarm)에 불과하고, 더 큰 국가적인 재앙이 올 것인데, 즉 유다가 국가적으로 모두 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Ⅲ. 대 재앙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5-15)
요엘은 네 가지 동사를 통해서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깨어라(wake up)’입니다(5-7).
5절입니다. “무릇 취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울찌어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찌어다 이는 단 포도주가 너희 입에서 끊어졌음이니.”라고 했어요. 술 취하는 자는 밤낮을 술의 노예가 되어서 술에 의존하고 삽니다. 술에서 인생의 기쁨이 된 것이 사라졌습니다. 대재앙은 세상에 취한 사람들을 번쩍 정신 차리고 그 생활에서 깨어서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애곡하라(lament)’입니다(8-10).
8절입니다. “너희는 애곡하기를 처녀가 어렸을 때에 약혼한 남편을 인하여 굵은 베로 동이고 애곡함 같이 할찌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모가 어려서부터 혼인할 사람을 짝지어 줍니다. 결혼을 안했어도 남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고자 했는데 남편이 죽어버렸습니다. 초야도 치루지 못하고 평생 생과부로 살아야 하니 얼마나 애절하게 울겠습니까? 그런 심정으로 울라는 것입니다.
셋째, ‘부끄러워하라(be ashamed)’입니다(11-12).
11절입니다. “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찌어다.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아 곡할찌어다” 농부들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도 밭에 곡식만 있으면 된다고 했습니다. 내 직장만 내 마음만 안정적이면 되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뭐가 중요하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못 알아보는 것은 주인을 알아보는 짐승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을 먹어야 사는 것이 영혼 있는 인생입니다.
넷째, ‘부르짖으라(cry out)’입니다(13-14).
요엘 선지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도 슬퍼하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메뚜기 떼가 와서 다 먹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로 바칠 제물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제’와 ‘전제’ 때 사용해야할 곡식이나 음료가 메뚜기 떼로 인해 다 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밭이 황무하게 되어 농부들은 밭의 소산과 밀과 보리가 없고, 포도원을 운영하는 자들의 포도주는 말랐습니다. 나무란 나무들도 메뚜기 떼가 다 갉아먹음으로 열매하나 없이 모두 시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국가적으로 큰 재앙이 임했음으로 제사장들이 먼저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굵은 배를 입고 크게 슬퍼하며 회개하라 하십니다. 13절에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맞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전에 드리지 못함이라” 탄식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요엘선지자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너희는 현세와 내세를 위해서 무엇을 의존하고 있느냐?” 또 한 가지는 “너희가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안전한 것이냐?”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와 일들을 겪고 있느냐?입니다.
이럴 때 사회적 거리를 두면서 조심하고 영적으로 졸던 사람은 깨어나고, 세상을 의지하던 사람은 애곡하고, 직업이나 양식과 재물 등을 의존했던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진실로 기도해 보지 못한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부르짖어 기도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까워진 여호와의 날을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수 있다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사미래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