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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마지막, 종말신앙(2)(벧후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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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재림신앙이 필요합니다
- 그날에 대비하며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 그 날을 사모하고 그 곳을 바라봐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 종말신앙(2)(벧후3:8-13) 

 

우리의 현실은 코로나19와 n번방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고 두렴과 공포가운데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신앙적 회의와 정말 말세지말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오늘 주시는 본문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 후서를 쓰게 된 동기는 외부적으로는 로마의 네로 황제의 핍박과 쫒겨남을 통해서 심리적, 경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거짓 선생들이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다시 온다고 하였는데 몇 십 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재림은 없으니 그런 것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재림을 부인하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내세에 대한 소망도 없어서 방탕하게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유혹에 넘어간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전혀 준비되지 않은 모습으로 있다가 멸망을 당할 것이기에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을 부인하는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논박하고 예수님의 재림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재림을 근거로 방탕한 삶을 씻어버리고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희망을 주고자 하였습니다. 큰 위로와 새 힘을 얻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주님의 재림 신앙입니다(8-10절)

 

최후의 심판이니, 예수의 재림이니 하는 말을 교회에서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처럼 첨단과학의 시대에 어찌 이런 허황된 이야기가 가능하냐’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또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 지금까지 이 우주 만물이 변함없이 존속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나 예수의 재림은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종교적인 공상일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경험과 이성을 중요시하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이며 불신앙일 뿐입니다. 그 증거 첫째로,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바뀌는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나와 있는 것처럼, 노아시대에는 큰 홍수가 나서 모든 인류와 동식물이 멸망을 당하고, 살아남은 노아 가족과 동식물을 시작으로 다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엽적으로 보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불로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유하신 뜻 안에서 이 세상에 종말을 고하시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벧후 2:9).

 

예수께서도 최후의 심판에 관해 여러 차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이밖에도 그 날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초대교회 때 약속한 말씀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피조물들은 여전히 있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9절에서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는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기 때문에,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시간이 매우 긴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을 뿐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에 매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에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의 생애 사상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2. 그날에 대비하며 경건하게 살아야합니다(11절)

 

그런데 그 날이 언제 올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예수님께서는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인자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관심은 ‘그날이 언제냐’가 아니라, ‘그날을 어떻게 기다리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마 24:44)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날이 “도적같이” 닥친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날을 예비하고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 곧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이 오는데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좇아 살다가 어찌 그날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어려움과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았던 욥과 노아 다니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때에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마지막 때에는 불로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불로 인하여 다 없어질 텐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불에 넣어도 타지 않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뒤져 불 속에서도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이 왜 살아났는지 알면 우리도 살아나는 비결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겠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왕의 앞에 불려와 심문을 당합니다. 왕이 마지막으로 제안합니다. 만약 이제라도 신상에 절을 한다면 살려 주겠다고 합니다. 비록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왔어도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가운데 높은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이 땅에서의 모든 영화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상에 절하고 목숨을 부지할 것인가 절하지 않고 죽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쉬운 선택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세 친구들에게는 목숨을 내건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다시 말하면 왕이 물어보나 마나 우리의 행동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뜨겁게 타는 풀무 불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입니다.

 

세 친구들은 더 감동적인 말을 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않겠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우리들의 생각과 달리 혹시 풀무 불 가운데서 죽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선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비록 종말의 때에 심판이 일어나지만 파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날을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 회복은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1~13절)우리들도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처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다가 그 날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노아는 심판이 가까워지는 마지막 때에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마25장에서 달란트비유에서 충성, 혼인집비유에서 준비된 신부를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며,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선을 행한 자가 결국 오른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3. 그날을 사모하고 그 곳을 바라봐야 합니다(12-13절)

 

본문에서 12-13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고 했습니다.

 

마지막 주님이 오신 후에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은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갑니다. 하늘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중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떠나가는 것은 새로운 상태가 되기 위함입니다. 하늘이 떠나가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함을 의미합니다. 큰 소리로 떠나가는 것은 그 심판이 무섭고 엄청난 것임을 보여줍니다.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집니다. 물질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새 하늘과 대응되고 물질은 새 땅과 대응됩니다. 따라서 물질은 땅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하늘과 땅은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납니다. 재림 때에 사람들이 행한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재림 때에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납니다.

 

이번에 코로나로 인하여 드러난 신천지집단의 교리나 신앙(교주가 구세주라, 시한부 종말론)은 이번 코로나로 인하여 서울시에서 파렴치하고 반종교적이며 위법적인 종교로 헌법적 해석 판단을 내 놓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장차 이뤄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에녹도 장차 오실 메시야를 보고 마지막 심판을 보았고 이사야는 사65장 17절에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며 사도 요한도 요한계시록 21장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는데 요계21:1-2절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드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지나갔음이러라” 이곳이 완전 리모델링된 곳입니다. 할렐루야!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곳을 예비하신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하늘의 영원한 맨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수돗물이 나오는 방에 미리 수돗물이 조금씩 흐르도록 수도꼭지를 조금 틀어 놓습니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는 상태에서 걸레를 들고 물을 닦으라고 할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수도꼭지를 잠그고 닦는다, 아니면 걸레로 방바닥만 계속하여 닦는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낼 때, 환자가 정말 퇴원할 만큼 좋아졌는지 테스트하는 방법인데 정상적인 사람은 수돗물이 열려 새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도꼭지를 잠그고 바닥의 물을 닦습니다. 이런 사람은 퇴원을 시켜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수도꼭지를 내버려두고 방바닥만 부지런히 닦습니다. 바쁘게 바닥을 닦지만 그는 아직 퇴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도 아직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요지는 문제의 근원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관계 회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빈손으로 떠나야 할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찾아오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확고히 믿고 노아와 다니엘처럼 거룩한 행실과 경건의 삶을 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위로와 소망을 얻고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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