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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메시야의 오심(슥9: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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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희망을 주는 사상 메시야 오심의 모습

                            

            메시야의 오심(슥9:9-10 )                 20191020 

 

 학개 선지자는 귀환한 백성들에게 중단된 성전을 재건하도록 직접적으로 제시한 사역이었다면 스가랴(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는 구원하시는 메시야에 대하여 말함으로 꿈과 희망으로 사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가 나귀를 타신 모습을 보여주심으로 어떻게 오시는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야의 오심은 겸손을 보여줍니다(9절).

 

  9절에 "시온의 딸아, 예루살렘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라고 선언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왜 메시야가 나귀를 타는지에 대한 이유는 겸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그 메시야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메시야는 바로 겸손한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서 겸손을 빼면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님은 겸손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겸손은 낮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강이동을 하셨습니다. 한없이 낮추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까지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이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에 보이셨던 대표적인 두 가지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찬예식'이고, 다른 하나는 '세족식'입니다. 세족식은 성찬예식과 함께 중요하게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떠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들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세족식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만 그중에 겸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그분은 높은 자로서 낮은 자를 섬기셨습니다. 힘 있는 자로서 힘없는 자를 생각했습니다. 가장 깨끗하신 자로서 가장 더러운 자를 사랑하고 용서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 예수님이 오늘 이렇게 초대하고 부르고 계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우리가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어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까? 겸손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늘 몸속 깊은 곳까지 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도 겸손하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없을 때도 겸손하고, 뭔가 가질 때도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교만하면 때가 망신합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반드시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선언이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교만하면 죽는 것이고, 겸손하면 사는 것입니다. 겸손을 보여주기 위해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날마다 자기를 낮추는 훈련과 연습으로 은혜를 받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공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9절).

 

  본문에서 우리가 아주 놓치지 않고 아주 중요하게 보아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입니다. 9절에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의 근본적인 의미를 전하는 말입니다. 메시야가 나귀를 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야가 어떤 분인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지 않아도 메시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공의요, 그분의 삶이 정직이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이 언제나 옳은 것이고, 그분이 가는 길이 공평한 길이었습니다. 나귀를 타신 메시야는 바로 그 공의를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스가랴 선지자의 이 고백은 그가 경험했던 삶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스가랴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겸손'과 '평화'는 말했지만 '공의'는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가랴의 말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스가랴는 이스라엘 민족의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시대에 민족이 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수모를 맛보았던 사람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에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생기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왜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공의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그들은 타락할 대로 타락했습니다. 왕부터 평민까지, 제사장부터 평신도까지, 가진 자부터 없는 자까지, 총체적인 타락이었습니다. 부정부패와 극심한 도덕적, 영적타락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선지자들이 눈물로 설득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러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하나님은 그냥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공의롭지 못했고, 바르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 아픔을 경험했던 스가랴가 여기에서 메시야를 공의로 묘사하는 것은 다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뒤 5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시대에 다시 이스라엘은 과거의 역사를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바르게 이끌고 가야 할 지도자들이 옳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당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공평하게 재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안다고 말했지만 근본정신과 의도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가차 없이 제거했습니다. 그래서 희생당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도 그래서 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무서운 줄을 몰랐고, 극도의 교만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결국 그 악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까지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세상과 열방을 향하여 '공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스가랴의 시대를 기억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사회학자이면서 신학자인 '앤드류 커크'는 성경을 근거로 '의, 공의(Justice)'의 실현을 위해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첫째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법을 공정하게 시행해야 하고, 둘째는 권력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셋째는 약자를 보호해야 하고, 넷째는 개인이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 그리고 다섯째는 제도나 법이 아니라 사람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이것이 공의요, 이렇게 할 때 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의 사는 곳이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까? 공의로운 사람, 공의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입니까? 부유한 나라, 돈이 많은 나라가 아닙니다.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것을 위해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평화를 보여줍니다(10절).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메시야의 두 번째 귀한 모습을 스가랴는 이렇게 알려줍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여기에서 화평, 평화를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언제나 전쟁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전쟁이 없는 상태, 싸움과 갈등과 분열이 없는 모습, 바로 그것이 평화입니다. 왜 메시야가 나귀를 타야 합니까? 평화를 위해서입니다. 평화를 전하고, 평화의 시대를 알리기 위해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옛날 전쟁을 위해서는 반드시 '말'이 이용되었습니다. 말은 전쟁 시에 타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말이 등장하는 곳에는 언제나 싸웠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위해서는 '나귀'가 이용되었습니다. 나귀는 평화 시에 타는 동물로 모두 인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싸움과 갈등이 아니라 평화요 안정을 전하기 위해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성경은 평화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평화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 사람과의 평화,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나라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날 때 인사하는 인사법이 다릅니다. 그 나라의 인사법은 그 나라의 과거의 삶과 문화를 대변합니다. 영어권에서는 서로 만나면, 'good morning' 이라고 인사합니다. '좋은 아침, 좋은 하루'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삶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것과 비교해서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안녕하세요' 이것이 인사인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안 죽었네요'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이 죽었으면, 인사가 '오늘도 안 죽으셨네요' 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는가를 한눈에 알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인사 중에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먹었니?' 라는 것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이런 인사가 나왔겠습니까? 당장 오늘 먹을 것을 걱정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끼니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인사도 점점 없어지고 있습니다.이처럼 서양과 우리나라의 인사가 있듯이, 유대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인사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만나면 서로를 향하여 '샬롬' 하고 인사했습니다. 샬롬은 '평화'라는 뜻입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이 평화인 것을 알았기에 그들은 평화를 기원했습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곳에 평화가 있습니다. 주님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평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하늘에서 내려오는 참된 평화가 여러분의 영혼과 마음을 덮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노래가운데 '희망의 나라로' 라는 가곡이 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가 해방 될 때에 감격을 안고 만들어 졌습니다.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뒤 정말 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노래에 담았고, 그 노래를 지금까지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자유, 평등, 평화와 행복 가득 차 곳 희망의 나라로..." 살기 좋은 나라에서 한 시대를 산다는 것은 진정 우리의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습니다. 겸손을 보이고, 평화를 사랑하고, 그리고 공의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로 더욱 가까이 가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은 없습니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심판하실 자리까지 이제 우리가 주와 함께 가야 합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이번 주간도 바르게 참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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